Z
14.01.13
ㅠ
정신 차리자. 헤매지 말고...
정성
14.01.12
어제 북한산 구기동에서 올라가서 비봉가는데 가슴이 쿵광쿵쾅하다. 이것은 다른 것에서도 느끼는 것인데 몸이 힘든것 같으면서도 나른하고 다른 잡생각이 안들정도로 몰입감이 크다 그래서 헬렌이 죽도록 20분 달리나 보다 9키로로 ..
나도 이런 러닝의 기쁨을 알아 보리라 이것은 죄가 아니니까..
존재가 바로 신이다
1. 마하라지; 이제, "사랑의 바탕은 필요"라고 내가 말했던 내용으로 다시 돌아갑시다. 지각 있는 존재에게 가장 귀중한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보십시오. 만일 그에게 이 세상에 있는 일체의 부를 택하겠는가, 아니면 그것이 없으면 육체는 시체에 불과해지는 '생명' 또는 '의식'(그것 위에 이미 쌓아 올려진 수천 가지 이름에 추가하여 어떤 이름을 부여해도 좋습니다)을 택하겠는가 묻는다면, 그 사람은 무엇을 택할까요? 의식이 없으면 이 세상에 있는 일체의 부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은 명백합니다. 이 실재는 지구상의 모든 감각 있는 존재들의 생명, 즉 온 우주의 존재 그 자체입니다. 그러므로 이것this-여기here-지금now, 이 생명의식이야말로 신일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다른 어떤 것보다도 사랑하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없다면 우주도 없고 신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바로 현존-사랑-신 입니다.
성 요한이 "신은 사랑이다"라고 했을 때 실재의 전체성을 의식하고 그렇게 말했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가 의도한 것은 그 자신이 순수한 주관성이자 본체로서 신과 서로 다르지 않다는것을 말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랑이며 신인 생명의식 안에 머무는 이는 신 안에 머물고 신도 그 안에 머물게 되는 것입니다.
2. 당신이라는 존재, 당신의 참된 자아, 당신은 그것을 사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간에 당신은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움직인다. 그것을 찾고, 알고, 소중하게 간직하는 것은 당신의 기본적 욕구이다. 이제 당신이 해야 할 것은 당신의 몸과 마음을 당신 자신에 대한 봉사에 현명하게 쓰는 것, 그것이 전부다. 당신 자신에게 진실하고 당신 자신을 절대적으로 사랑하라. 당신 자신을 사랑하는 것만큼 남을 사랑하는 척하지 마라. 남들을 당신과 같은 하나로 깨닫지 못하는 한 당신은 결코 그들을 사랑할 수 없다. 다른 사람에 대한 당신의 사랑은 당신을 아는 것의 결과이지 원인이 아니다. 자신에 대한 깨달음 없이는 그 어떤 미덕도 진짜가 아니다. 의심함 바 없이 똑같은 의식이 존재하는 모든 것을 통해서 흐른다. 그리고 당신 역시 그 의식이라는 것을 확연히 알게 될 때, 당신은 모든 것을 자연스럽게 저절로 사랑하게 될 것이다. 당신이 자신에 대한 사랑의 깊이와 충만을 깨닫게 될 때, 모든 살아 있는 존재와 전 우주는 당신의 애정 안에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 어떤 것이라도 당신과 분리해서 보게 되면, 당신은 그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결코 그것을 사랑할 수 없다. 멀리함은 공포를 낳고, 공포는 멀리함을 더욱 깊게 만든다. 그건 정말 악순환이다. 오직 자아를 깨달음, 이것만이 그것을 타파할 수 있다. 그것을 위해 굳세게 매진하라.
한번은 한 유럽인이 다음과 같이 마하라지에게 물었다.
방문자: 계율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신을 사랑하라' 입니다. 하지만 저는 다음과 같은 말, 즉 '온 마음과 온 영혼과 온 정신을 다 바쳐서'라는 것 때문에 그 계율이 저를 절망시킨다고 느낍니다. 그 말은 단순히 경건한 행동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온 마음과, 영혼과 정신을 다 바쳐서'는 보이는 사랑이 사랑처럼 보여야 할 뿐만 아니라 반드시 사랑 그 자체여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사랑하고 있는 것처럼 행동할 수 있을지 몰라도, 어떻게 진정한 사랑을 확신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저절로인 행동을 확신할 수 있습니까?
마하라지의 대답은 단순하고 아름다웠다.
마하라지: 자아의 깨달음 없이는 어떠한 미덕도 진짜가 아닙니다. 같은 의식이 모든 것 속에 흐르며 당신 역시 그 의식이라는 것을 깊게 확신할 때, 비로소 당신은 모든 것을 저절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확신은 물론 직관적인 각성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1. 개체의식은 태어난 이후로 육체와 함께하고 있는 의식의 일부분으로 간주한다. 만약 우리가 이 의식 없이 태어났다면 한 조각 먼지덩어리처럼 던져져 파괴되었을 것이다. 의식 없이는 태어날 수 없다. 그러므로 마하라지는 우리의 진정한 본질을 이해하도록 도와줄 수 있는 단 하나의 원천이 의식임을 이해하라고 말한다.
2. 그 다음에 마하라지는, 의식을 소유하는 것은 개인이 아니라 전체의식이며 전체의식은 절대의 현현된 객관적 측면이며, 전체의식 안에서 수십억 인간을 포함하여 전 우주가 등장한다고 말한다. 또한 전체의 나타남은 단지 가공이라고 말함으로써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여 의식을 개인적 자산으로 간주하는 어리석음으로부터 벗어나게 한다.
3. 이 상태가 명백히 이해되면 현시된 것은 덧없는 육체가 아니고, 심신구조체에 감각과 지각과 생기를 주는 의식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육체는 언젠가는 죽고 현현된 의식은 사라진다. 그리고 영원한 절대만이 존재한다.
4. 실재한다고 여기는 개별적 자아라는 것 자체가 잘못된 개념이고 다른 현상들과 마찬가지로 육체도 의식 안에서의 경험에 불과하여 어떤 의지를 행사할 존재가 없다는 것이 일단 이해가 된다면 무언가를 하는 어떤 존재가 어디 있겠는가? 깨닫는 것이 전부다. 이 깨달음으로 철저히, 그리고 완전히 충만되는 것이 해탈을 위해 필요한 전부다. 행동에 대한 자유의지를 가진 독립된 주체라는 잘못된 개념의 소멸 없이는 어떤 것도 이룰 수 없다. '나라는 생각'이 소멸되지 않고서는 '참나'는 나타날 수 없다. 나라는 생각이 사라지고 나면 나는 바로 나 자신이다.
5. 마하자지가 말한 것처럼 화살이 과녁에 그대로 꽂힌다면 더 이상의 의문은 있을 수 없다 . 그러나 직접적이고 직관적인 깨달음은 지성에 의한 개념화라는 방해에 부딪혀 어려워진다. 지적인 이해는 인과관계에 바탕을 두는데, 이 인과관계란 개념화의 바탕을 이루는 일시적 이원성의 여러 특징 중의 하나다. 직관적인 이해는 원인과 결과가 하나인 전체적인 것이다.
6. 분명히 우리의 모든 과거 경험을 조심스럽게 반추해보면, 삶이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우리 자신에 의해 영위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꿈속의 모든 등장인물이 하는 것처럼 저절로 이루어 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의지는 우리 삶에 있어서 결코 진정한 요소가 아님을 보여줄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핵심이다.
마하라지는 묻는다.
마하라지: 음식이나 물 없이 잠도 자지 않고 얼마나 오랫동안 살 수 있겠습니까? 육체의 배설 행위 없이 얼마나 오랫동안 생존할 수 있겠습니까? 숨 쉬지 않고 얼마나 오랫동안 버틸 수 있겠습니까? 잉태되었을 때 당신은 의지를 행사했습니까?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자랄 때 스스로의 의지로 성장했습니까?
마하라지가 의지적 행위란 실제로 있을 수 없다고 말할 때, 그는 분명히 어떤 의지를 행사할---어떤 행위를 한다거나 하지 않는다거나---실체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그리고 우리가 의지의 결과라고 여기는 것은 단지 저절로 일어난 연기 법칙임을 이해하길 바란다.
우리는 어떤 행위가 그 당시에 자신에게 유리하다고 판단되는 것과 일치할 때,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성취했다고 자랑한다. 그리고 그것을 개인적인 성취하고 여긴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 때는 분노와 슬픔과 좌절이 일어난다. 의식의 작용인 개체의식은 분명히 '속박'을 엮어내는 역할을 한다. 반야의 작용과는 무관하게 행동하려 애쓰는 거짓 자아의 어리석음을 깨닫는 것이야말로 깨어 있음이다. 오직 그러한 깨달음만이 이 삶이 끝날 때까지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을 완전히 받아들일 수 있게 한다.
삶이 그렇게 살아지는 동안은 분명히 모든 것은 '하나'라는 명확한 의식이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상대적인 대극의 '다른 한쪽'이란 거짓 주체의 대상으로 지각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동일한 본질의 현상적인 면으로 지각되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산다는 것 자체가 자유로운 삶이다. 그 속에서는 거짓 자아의 긍정적 행위나 부정적 행위 어느 것도 가능하지 않으며, 거기에는 의지가 없다. 개인적인 의지는 없으며 모든 행위는 저절로인 것이다. 이 삶이라는 연극 또는 삶이라는 꿈에서 역할을 수행하는 배우는 삶을 일어나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마하라지는 말하기를 이것에 대한 깨달음이 있기만 하면 모든 삶은 유희, 곧 즐거움이다.
6. 마하라지는 반복해서 자기는 어떤 개인에게 말하는 게 아니라 의식에게 말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말은 의식으로부터 생겼으며 의식을 향해 있다. 말을 들어야 하는 것은 의식이고, 그 말의 의미가 직관적으로 이해되면 그 말은 의식으로 통합돼야만 한다. 어떤 이득을 얻을 목적으로 듣는 '자'가 있을 땐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이라고 마하라지는 경고한다. 실제로 피해야 할 것은 바로 지성의 방해다. 이전에 분명히 보았듯이 깨달아져야 하는 것은 거짓 자아의 공허함이다. 말을 듣는 것이 거짓 자아인 한, 거짓 자아와 말 자체의 뿌리인 상대성과는 상관없는 올바른 방향 제시가 가능할 수 있을까!
말은 오직 지식적으로 분석하지 않고 직관적으로 받아들여질 때 깊고 미묘한 의미를 전달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결과는 대상과 스스로를 구분 짓는 거짓 자아에 의해 외부 세계의 단순한 지적 이해에 불과하게 된다.
마하라지는 말한다.
마하라지: 당신은 전체적 현상의 나툼 중 일부만을 개별적 자아로 받아들임으로써 실상을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진실한 깨달음은 거짓 자아가 완전히 소멸할 때에만 가능합니다.
마하라지: 여러분들은 내게서 깨달음을 위한 수행 계획표 같은 것을 기대하며 여기에 모였습니다. 그러나 항상 이야기하는 것처럼, 독립된 실체란 없기 때문에 속박의 문제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어디에도 구속되어 있지 않다면, 해탈의 필요성 역시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여러분이 생각하는 자신은 진정한 자신이 아니하는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 중의 대부분은 내 말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어딘가 다른 곳에 찾아가서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한 목록을 받고는 행복해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지시사항을 아주 충실하고 부지런히 따릅니다. 그러나 결국 그들이 어떤 수행을 하든지 그들 자신과 허구적인 개체와의 동일시를 강화시킬 뿐이므로, 진리를 깨닫는 것과는 오히려 거리가 멀어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어떻게든 불완전한 인간에서 성자라고 알려진 사람같이 완전한 인간으로 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생각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그 자신은 단지 하나의 개념일 뿐이며, 꿈속에 투영된 환영에 지나지 않습니다. 어떻게 환영이 그 자신을 완전하게 함으로써 꿈에서 깨어날 수 있겠습니까?
유일한 깨달음은 '있는 그대로' 아는 것입니다. 깨달음에 있어서 '누가'라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깨달음 바로 그 자체가 우리의 진정한 실체이고, 이것을 깨닫기 위한 전제 조건은 분리의식의 사라짐입니다. 깨달아지는 것은 전체성으로서 현상 그 자체이지, 분리된 관찰자로서 '누구'에 의해서가 아닙니다. 깨달음은 절대의 전체적 통각입니다. 깨달음은 바로 본성으로서 당신 자신입니다. 그리고 의식 속에 나타나는 우주는 모든 지각력이 있는 존재를 반사하는 거울입니다. 다시 말하면 의식은 현상적으로 드러나는 세계의 근원입니다. 또한 의식은 그것이 표현된 내용물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깨달음은 '누구'라는 의식의 전체적 작용의 극히 일부분인 개체적 현상과는 무관합니다. 깊은 직관을 통한 이러한 사실의 깨달음이야말로 진정한 해방이며, '살아 있는 꿈'으로부터의 깨어남입니다.
스승은 무엇을 합니까? 그의 모든 행위는 내면에 있는 '사드구루'를 향합니다. 사드구루는 여러분이 그를 기억하든, 기억하지 못하든 항상 존재합니다. 여러분이 무엇을 하든 항상 그와 교감을 나누는 것이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의 전부입니다. 노력을 통한 어떤 것도 도움이 될 수 없으며, 오히려 방해물이 될 뿐입니다. 개체적 노력은 심지어 위험하기조차 합니다.
방문자: 선생님, 저는 죽음은 두렵지 않지만 고통에 대해서는 심한 두려움을 느낍니다. 어떻게 하면 고통에 대한 두려움을 없앨 수 있을까요?
마하라지는 웃고 나서 말했다.
마하라지: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내가 도울 수 없어 유감이군요. 육체적 고통을 피하거나 줄이는 방법을 아는 사람도 많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내가 당신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고통이란 무엇이고 또 누가 고통을 받는가 하는 것을 설명해주는 것입니다. 항상 문제의 뿌리에 접근해야한 합니다. 자 당신에게 묻겠습니다. 고통의 경험이 언제 처음 있었나요? 한 백년 전의 고통에 대한 경험을 갖고 있습니까? 고통의 경험이 언제 시작되었습니까? 깊이 생각해서 해답이 머리가 아닌 당신 내면에서 생겨나오도록 하세요. 인생이라는 것은 바로 경험의 총체입니다. 순간에서 순간으로 이어지며 수평적으로 늘어나는 경험의 집합입니다. 그런데 경험이 뭔가요? 그건 외부 세계의 자극에 대한 반응으로서, 감각을 통해서 즐겁다, 마음에 든다, 기분 나쁘다, 싫다 등으로 해석되는 것 아닙니까? 고통이라는 게 따로 있어서 그걸 경험하는 것은 아니지요? 그렇습니다. 사람은 고통을 경험하는 게 아닙니다. 단지 경험을 겪을 뿐입니다. 그것을 즐겁다고 하든 기분 나쁘다고 하든 말입니다.
당신이 궁금해 하는 근본적인 질문은 이겁니다. "누가, 또는 무엇이 경험을 겪습니까?" 진정한 '나'는 어떠한 경험도 겪을 수 없습니다. 경험을 하는 것은 상대적 객체로서의 당신이나 나일뿐입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사실입니다. 나는 이 문제를 당신 스스로의 힘으로 풀도록 해야겠어요. 아니 그보다는 저절로 풀리게 한다는 말이 더 맞겠지요. 여하튼 계속해봅시다. 진정한 '나'는 결코 경험을 겪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객체로서의 어떠한 흔적도 가지고 있지 않은 절대적 주체이며 유일성이기 때문입니다. 경험을 하는 것은 객관적 존재입니다. 더구나 그 객관적 존재는 실체가 없는 가상의 존재이며, 의식 안의 개념으로만 존재하는 겁니다.
이 사실을 명심하세요. 경험을 하는 것은 오직 의식일 뿐입니다. 경험, 즉 자극에 대한 반응은 오직 의식을 통해서만 일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경험을 치른 것은 의식이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당신 자신을 육체와 동일시하고 있기 때문에 내 말이 잘 이해가 안 될 겁니다. 몸이라는 것은 경험을 기록하는 도구입니다. 그것은 당신의 참모습이 아닙니다. 참나는 순수한 주체이며 절대적 근본입니다. 그런데 그걸 잊고서 객관적 존재를 자신인 줄로 아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나는 경험을 겪는다"라고 생각하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속박이 되는 것입니다. 내말을 이해하겠어요? 나는 영원하고 무한한 절대적 실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경험도 알지 못합니다. 경험을 겪을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자신을 감각기관으로 여기고 있다는 겁니다. 그 그릇된 자기 동일시가 당신의 고통과 속박의 이유입니다.
감각기관이 작용할 수 있게 하는 의식작용이 있는 한,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삶이 있고 경험이 있고 고통이 있을 겁니다. 그러나 '참나'로서의 당신은 그 모든 것을 지켜볼 뿐입니다. 모든 작용은 본체로서의 나의 객관적 표현이고, 모든 지각 있는 존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참나는 어떠한 경험도 겪을 수 없고, 오직 대상화된 '너'와 '나'만이 경험을 겪을 따름이다"
- Pointers from Nisargadatta Maharaj 담배 가게 성자/ "고통에 대한 두려움" 중
누군가가 이렇게 질문했다.
"내가 소유한 의식....."
만약에 그 말을 어쩌다 방문한 사람 중의 한 사람이 했다면 마하라지는 아마도 그냥 넘어갔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질문을 한 사람은 그 정도는 충분히 알고도 남을 만한 사람이었다. 그 말을 듣고 있던 마하라지는 갑자기 "그만"이라고 소리쳤다. 육체가 극도로 쇠약해진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외침은 마치 대포소리 같았다. 그 말을 한 사람을 노려보면서 "내가 소유한 의식"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냐고 소리쳤다.
마하라지: 당신이 방금 한 말이 얼마나 멍청한 말인지 압니까? 어떻게 당신 혹은 개체가 의식을 소유할 수 있단 말입니까? 당신이 무심결에 말한 의식이 상상하기조차 힘들 정도로 신성하고 위대한 것이라는 것을 알기나 합니까? 당신이 거기에 어떤 거룩한 이름을 붙여도 그것의 실상과는 아주 멀어집니다. 의식이 우리의 본성 그 자체의 표현이라는 기본적 사실마저 잊었단 말입니까? 전체성으로서의 절대가 현시를 통해 그 자신을 나투어 인식하게 되고, 전 우주가 현상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은 바로 이 의식의 작용을 통해서입니다. 당신이 그렇게 말한 것은 부주의해서일수도 있습니다. 그랬는지 아닌지 나는 모르지만 그러한 부주의는 당신이 자신을 개체와 얼마나 동일시하고 있는지를 나타냅니다. 당신은 자신이 개체이고, 그 개체가 의식을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어떤 것이 다른 어떤 것을 소유하는 개념으로 본다면, 당신이 자신이라고 여기는 개체뿐만 아니라 수백만의 다른 개체를 소유한 것은 오히려 의식입니다. 이 의식이 수백억의 존재를 통해서 전체적으로 작용하는 것입니다.
- Pointers from Nisargadatta Maharaj 담배 가게 성자/ "마지막 날의 가르침들" 중
The book you read for pleasure can be read in a state of relaxation, and nothing is lost. But a great book, a book that raises and tries to answer great fundamental questions, demands the most active reading of which you are capable. You don't absorb the ideas of a great thinker the way you absorb the crooning of a popular singer. You have to reach for them. You cannot do that while you are asleep.
나는 의식 그 자체, 절대자각(Absolute Awareness)
나는 몸-마음의 구조체(현상체)가 아니다
현상적 존재에 지각력을 불어넣어주는 의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