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행동이나 정신 과정 중
분석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분석하여 제출하라는 게
이번 수업의 과제다.
나는 아주 신이 난다.
내가 울다에 와서 맨날 하는 일이 이것이라서
별로 어려울 것도 없는데다가
이참에 그냥 일기로 쓰기만 하는 게 아니라
참고 서적도 읽고
형식을 갖춰서 써볼 수 있게 되어서
설렌다.
무엇을 분석해볼까.
나의 정신과정이라
모든 것이 내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것
사람들을 좋아하지만 피하고 무서워하는 것
극한의 스트레스 상황에서 깊은 우울에 빠지는 것
성폭행을 당해 괴로운 것
.
.
음
사실 내가 심리학을 통해서 비춰보고 싶었던 것은
'친족 성폭력 피해로 인한 영향'
이라는 굉장히 광범위한 주제였었다.
그런데 '행동'이나 '정신 과정'이라는
조금 더 작은 범위의 주제가 주어지니
사실 남아 있는 게 별로 없다.
지난 2년 동안
웬만한 것들은 다 분석하고 떨쳐버렸기 때문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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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그 일을 내 잘못이라고 생각했을까?'
'왜 탈출하거나 반항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순응하게 되었을까?'
'그 뒤로 가지게 된 수치심과 죄책감의 정체는 무엇일까?'
'지금 나는 왜 이렇게 답답하고 슬프고 혼란스러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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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런 게 분석하 거리가 되는 지 모르겠다.
'아니'다 라는 것만 인정하게 되면 끝나는 건데.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기 위해 노력하면 되는데
분석하는 게 맞는 일인지는 잘 모르겠다.
한 편으로는 분석과 행동이 같이 가야 하는 것 같기도 하다.
지금껏 그래왔듯이.
분석이 선행되고 그 뒤에 행동이 따라온다.
내가 인간관계 맺기가 힘든 이유를 먼저 분석한다.
자존감의 문제,
라는 것을 밝혀내고
내가 왜 자존감이 낮은 지 분석해내고
자존감을 높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지 알아내고
그리고 실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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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찬가지.
내가 왜 지금 이렇게 혼란스러운 지
분석해본다.
무엇이 힘든 것인지.
무엇이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인지
분석해본다.
다른 사람들에게 의견을 들어도 좋고
책의 힘을 빌려도 좋고
스스로를 파고들어도 좋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혼란스럽지 않을 수 있는지
알아낸 다음,
그 일을 하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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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지금 분석하고 싶은 행동이나 정신 과정은
'성폭행으로 인해 힘들어하는 것'
왜 성폭행을 당해서 힘이 드는가?
무엇이?
이미 지나간 일인데, 왜?
다시는 없을 일인데, 왜?
왜 붙잡혀 있는가, 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가.
그 경험의 어떤 측면이 나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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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출하는 일이 조금 걱정이긴 하지만
그건 나중 일이다.
이제부터는 오로지 나를 위한 일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