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회: 3133 , 2014-02-18 12:20 |
내 사건이 법원으로 넘어갔다.
재판 날짜도 잡혔고,
오늘은 보호관찰소에 조사를 받으러 간다.
생활은 아주 만족스럽다.
감사한 친구네 가족들 덕분에
안정적으로 생활하고 있다.
어제는 친구 엄마의 생신이셔서
같이 생일 파티도 하고, 맛있는 저녁도 먹었다.
친척들이 이제는 합의해달라고 전화해오지 않는다.
내가 한동안 전화를 한통도 받지 않았더니,
포기한 모양이다.
어쩌면 변호사와 접촉을 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 가서는 내가 지금 어떻게 생활하고 있는지,
가해자에 대해서는 어떤 처벌을 원하는 지 등등의
질문을 받게 된다고 한다.
있는 그대로,
차분하고 야무지게 대답하고 와야겠다.
상담소 선생님께서 같이 가주신다고 해서 마음이 한결 편하다.
내가 어디 조사 받으러 간다고 했을 때
선뜻 같이 가주겠다고 하는 분이 계셔서 정말 좋다.
또,
내가 재판 날짜가 잡혔다고 말했더니
바로 같이 가주겠다고 말해주는 친구가 두 명이나 있다는 것에
정말 정말 감사하다.
그리고 나를 날마다 성장시켜주는
책들에도 감사하다.
삶으로 다시 떠오르기,
술 취한 코끼리 길들이기,
라는 두 책은 내적으로 나를 참 많이 안정시켜 주었다.
특히 끊임없이 생각을 하고
과거의 기억들을 떠올려 괴로워하고
앞으로의 날들을 비관적으로 생각하며
고통받던 나에게,
지금에 있을 수 있게 해준 고마운 책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책을 받아들여준 나 자신에게 감사하다.
이렇게나 잘 받아들여주는 내가 정말 좋다.
지금에 있으면 괴로울 일이 줄어든다.
과거에는 나쁜 일이 있었고
미래에도 나쁠 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지금 당장은 괜찮으니까.
지금 나는 단지 컴퓨터를 하고 있을 뿐,
문제 될 건 없으니까.
'나는 성폭행을 당했어'
라는 심리적 시간에 지배될 때
괴로워지는 것이니까.
지금 이 순간에 나는
사랑하는 친구와
고마운 친구의 언니와
그들의 따뜻한 집에 누워
감사의 글을 쓰고 있을 뿐이다.
지금 이 순간만을 놓고 보자면
오히려 좋은 날이다.
.
.
아버지에게는 강한 처벌이 내려졌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할 것이다.
어줍잖게 합의할 생각이나 고소를 취하할 생각도 없다.
아빠는 당연히 처벌받아야 한다.
그만큼의 죄를 지었으니까.
물론 동생한테 미안한 마음도 있다.
아빠가 전과자가 되면 나나 내 동생의 인생에도 안 좋은 영향이
아예 없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동생을 사랑하기 때문에 정말 안쓰럽지만,
그건 내 잘못의 결과가 아니라
아버지의 잘못의 결과이기 떄문에
여기에 대한 죄책감과 책임은 아버지가 져야 하는 것이다.
내가 아니라.
나는 미안한만큼 동생을 더 사랑해야겠다.
.
.
아잔 차라는 승려가 말했다.
무엇을 하든지 내려놓는 마음으로 하라고.
무엇이 되려 하지 말고
앉을 때는 앉고
걸을 때는 걸으라고.
빗자루질을 할 때는
온 존재를 바쳐 빗자루질을 하라고.
나도 이 순간에 온 존재를 바쳐야겠다.
그것이 바로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인 것 같다.
아잔 차의 제자인 아잔 브라흐마는
교도소의 재소자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한다고 한다.
자신을 '범죄자'로 생각하지 말고
'나는 범죄를 저질렀다'라고 생각하라고.
전자처럼 생각하면
자신이 무엇을 하든 그것이 범죄자의 행동이 될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후자처럼 생각하면
그 범죄가 자신의 모든 것이 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그러니까
나는 성폭행 피해자,
가 아니라
성폭행을 당한 적이 있는 것,
이다.
내가 하는 모든 행동이 성폭행 피해자의 정체성을 띠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나는 성폭행을 당한 것 외에도 살면서 많은 일을 했고,
많은 일을 겪었다.
그 모든 일들이 성폭행과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다.
나에게 어떤 문제가 있다고 해도
그 모든 것들이 성폭행 때문에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나는 성폭행을 당한 기억도 갖고 있지만
정말 행복했던 기억들도 많이 갖고 있다.
그것은 단지 나의 '일부'일 뿐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내려놓으니
마음이 한결 편하다.
.
.
그리고 무엇보다도
'모든 것은 지금까지 해온 그것만으로, 완성된 것입니다'
라는 말이 가장 좋았다.
지금만으로도 완성,
이라는 말.
나는 항상 나에게 문제가 남아 있다고 생각하고
더 고치려고 노력했었다.
조금 더 고쳐야 한다고,
이런 점을 조금 더 바꿔야 한다며
공부하고 고쳐나갔었다.
언젠가 끝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좀처럼 끝이 보이지 않았고,
그러는 동안 나는
'성장하는 사람'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아직 문제가 남아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이제 내려놓기로 했다.
지금만으로도 나는 괜찮다.
지금 이 순간의 나는,
이것 그대로 완성,
이다.
문제될 건 없으며
고쳐야할 것도 없다.
지금만으로도 나는 완성되었다.
프러시안블루_Opened
14.02.18
하나양. |
chb00
14.02.18
잘다녀오세요^^ |
B
14.02.18
좋은 말들에 좋은 영향 받아갑니다. 좋은 결과가 있길 바라요~ |
jkl
14.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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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영자
14.02.18
파이팅하시길 바래요.. 참 현명하고 용기있는 사람입니다.._()_ |
피어나
14.02.19
응원합니다. 진심으로요. . . 무교이지만 기도해드리고 싶은 마음이에요. 힘내세요! |
정은빈
14.02.20
항상항상 응원하고 있어요! 하나님이 이렇게 힘을낼때마다 제가 더 힘이나는 기분이네요 앞으로도 파이팅입니다! |
자유
14.02.20
정말 멋있으세요. |
시크뽕
14.02.20
하나"님 글들 다 읽진 못했지만 속이 꽉 차있고 정말 멋진분이라는 생각이 드네요~항상 화이팅하시고 힘내세요~ |
李하나
14.03.01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고소 과정 내내 여러분들의 댓글들을 고이 간직하고 있답니다. 감사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