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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하나
 날개 잡힌 잠자리   cinq.
조회: 2705 , 2015-03-01 18:53


왜 아버지에게 성폭행 당했다는 말은 
사람들에게 쉽게 꺼낼 수 없는 걸까? 

손 끝에서는 이제 잘 나온다.
그런데 친구들 앞에만 가면 
목구멍에 꽉 막혀서 도저히 나오질 않는다.

내 잘못도 아닌데,
고소도 했고 
아버지가 다 잘못한 것임이 밝혀져서 처벌도 받았고.
다 지난 일인데,
나는 이제 극복하고 잘 살아나가고 있는데.

그걸 당당히 이야기하는 것이 너무 힘들다.



왜? 



이게 힘든 게 내가 날아가지 못하도록 막는 
가장 큰 원인이다.
나는 충분히 사람들에게 마음을 더 열 수 있고
사람들과 더 사랑을 나눌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닫게 되고
벽을 치게 되는 이유.




.
.

나는 날지 못하는 잠자리.
사람들은 나를 보면서 날지 못한다고 수군거린다.
날개를 쓰지 못한다고 생각하겠지.
다쳤거나, 태어날 때부터 없었거나.

하지만 그게 아니다.
나는 단지 날개를 오래 잡혔을 뿐이야.

날개를 잡혔던 잠자리는,
다시 놓여나도 바로 날아가지 못한다.
날개를 오래 잡혔던 잠자리일 수록
다시 날아가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

나는 다만 아주 오랫동안
날개를 잡혔던 것 뿐이다.

다시 날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어.
이제 다시 곧 날개를 펼 수 있을 거야.

내 날개를 잡은 사람은 
단지 나보다 강했던 사람.
그가 내 날개를 잡은 순간, 
내가 아무리 파닥거려봤자, 
나는 벗어날 수 없었어.

그는 가끔 내 날개를 놓아주기도 했지만, 
내가 다시 날 수 있게 되기 전에
다시 잡아버리곤 했지.

그 사람은 말해.
나는 그냥 네가 좋았던 거라고.
너를 가까이에서 보고 싶어서 그랬다고.
너를 만지고 싶었고, 같이 있고 싶었다고.

하지만 잠자리에게 그 시간들은 괴로웠어.

잠자리에게 물어보았니.
네 날개를 잡아도 좋으냐고.
잠자리의 눈을 보았니.
날개를 잡혀 괴롭다고.


나는 원래 훨훨 날아다니던 잠자리.
나를 좋아하던 누군가가
내 날개를 잡았지.
그리고 놓아주지 않았어.
아주 오랫동안.

몸부림도 쳐봤어.
하지만 그럴 때마다 얇은 내 날개가 찢어지기만 했어.
나는 무서웠지.
이러다 내 날개가 떨어질까봐.
그래서 죽게 될까봐.

몸부림을 쳐봤자
날 잡은 손은 끄떡도 하지 않고
날개만 찢어지는 걸 느낀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기 시작했어.

그리고 아주 오래 뒤에
나는 드디어 자유를 얻게 되었지.
기억을 더듬어 날아보려고 했지만 
왜인지 날 수가 없었어.

날개가 펼쳐지지가 않았어.
감각이 없어진 거야.
날개를 펴본지가,
날아본 지가 너무 오래 돼서.
날개가 떨어져버린 게 아닐까 무섭기도 했어.



하지만 나는 믿어.
내게는 아직 날개가 있다고.
그래서 조금만 기다리면
다시 날개를 느낄 수 있을 거야.
날개를 펴고, 날 수 있을 거야.

나는 단지 너무 오래 잡혀 있었을 뿐이니까.



다시는 아무도 내 날개를 잡지 않길 바라.
보고 싶더라도
내가 날아가길 원하지 않더라도.
내 날개를 잡는 건 
나를 좋아하는 올바른 방식이 아님을 알아주길 바라.

나는 아마 한동안 사람을 무서워하겠지.
누가 다가오면 또 다시 내 날개를 잡지 않을까,
두려워 할 거야.

나를 해치려는 게 아니라고
나는 너를 좋아하는 거라고, 
누가 아무리 말해도
나는 오히려 더 겁을 낼 거야.

옛날에
나를 좋아한다면서
내 날개를 잡아 놓아주지 않았던 사람이 있다면서.
너도 내가 좋다면
그렇게 나를 잡을 지도 모른다면서.


사람을 믿는 데 시간이 좀 걸릴 거야.
좋아한다면 나를 자유롭게 날아다닐 수 있게 내버려두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믿게 되기까지.
나는 아직도 내가 좋다는 사람이 두렵거든.
나를 보고 싶다는 사람이 두렵거든.



하지만 그래도 살다보면 믿어지겠지.
살다보면 날아지겠지.
잡혀 있던 날들 보다
아직 살 날들이 더 많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