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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하나
 고민고민   cinq.
조회: 2111 , 2015-06-24 12:52


터키로 교환학생을 가볼까 생각 중이었다.
아니, 터키든 어디든 내년에는 교환학생을 가기로 마음을 먹었었다.
거기에 맞춰서 계획을 세웠고
한 학기를 보냈다.

그런데 방학이 시작되니 또 고민이 된다.
뭐 좋은 쪽의 고민이긴 하지만-
한국에서 학교 다니는 게 재미있어졌달까.

이런 학교 또 언제 다녀보겠나 싶기도 하다.
사람들도 너무 좋고
교수님들한테도 배울 게 정말 많다.

여기서 5년 동안 공부하면서 나는 정말 더 많이 좋은 사람이 되었다.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넘쳐나고,
배울 점들이 너무 너무 많아서 학교에 오는 것만으로도
한 뼘씩 성장하는 기분.

내 페이스북에 좋은 글들이 넘쳐나고,
내 주변에 좋은 기회들이 넘쳐나도록 해준 이 학교.

사실 그동안은 사는 게 힘들어서 학교도 힘들기만 했는데,
다 잘 해결되고 난 뒤 가벼운 마음으로 다닌 학교는 정말 천국이었다.
여러 과제들을 하면서 정말 많이 배웠고
사람도 많이 얻었다.

작정하고 특별한 대외활동을 하진 않았지만
오히려 다양한 경험들을 했다.

심폐소생술을 배워서 사람들에게 가르쳐주기도 했고
한국 사회의 리더십에 대해서 시청에서 사람들을 대상으로 인터뷰도 따보고
(특히 외국인 인터뷰가 재미있었다)
대안학교 선생님을 인터뷰 해보기도 하고
사회를 어떻게 바꾸면 좋을 지 풍물을 겻들여 연극도 해보고
내가 갖고 있는 문제들- 성폭력,연애 등등-에 대해서 연구도 해봤다.
그리고 그 결과물을 교수님에게 제출하기도 했다.
(내가 성폭력 생존자임을 스스럼 없이 밝힐 수 있는 교수님과 함께
공부하는 것도 정말 행운이다)

얼마 전엔 친구랑 레포트 쓰러 국립중앙도서관에 갔다가
밥을 먹고 수다를 떠는데,
복지가 왜 필요한 지, 민주주의는 어떻게 실현할 수 있는 지
정말 유레카적인 발견을 했다.
발견이라기보다는 논증을 해냈다는 게 맞겠다.

청각장애인과 수화에 관련된 발제를 준비하면서 방학 때 수화를 배우기로 했고,
비폭력 대화, 국제 개발 협력 전문가들 초청강연을 들으면서
다시금 잊었던 관심사가 되살아 나기도 했다.

같이 여행 갔다 온 언니와 만든 포토북이 거의 완성되어서
다음 주 월요일에 제작 신청을 할 것이고,
오늘은 언니와 영화 소수의견을 보러 간다.

지난 달에 도시가스 요금이 좀 많이 나와서 한 달 동안 아껴 썼는데
정말 3분의 1로 줄어서 기분이 좋다.

방학 때 보드 카페에서 일을 하기로 했고,
세미나를 하나 할 것이며, 수화를 배울 것이다.
내년에 교환학생 갈 때 필요한 돈을 벌어야 해서
이 이상의 활동을 못 해서 아쉽지만,

원래 하나를 선택하면 하나는 버리는 것이다.
나의 조건 상 하고 싶은 모든 조건을 충족하며 살 수는 없으니까.
잘만 하면 충분히 행복한 방학을 보낼 수 있다.

아,
맞아,
그리고 영어 공부를 해야 한다.
교환학생 지원하려면 공인 시험 성적이 필요해서.



.
.


어쨌든 이번 학기는 내가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을 잘 조화시킨 한 학기였다.
늘 해왔던 과제이지만 정말 내가 하고 싶은 주제를 택해서 하고 싶은 방식대로 했다.
주어지는 과제 자체가 재미있기도 했고.

그래서 과제를 하면서도, 그걸 친구들과 나누면서도
정말 성장했고, 그래서 학교가 정말 좋았다.

민주주의에 대해서 제대로 배웠고
사회과학이 뭔지, 왜 필요한 지, 그리고 꼭 필요하다는 것까지도 배웠다.
물론 이런 것들은 주구장창 귀가 닳도록 들어온 것이지만
그게 이렇게까지 마음에 와닿고 체화가 된 것은 이번 학기 들어서이다.

체화가 됐다는 것은 내가 그래서 어떻게 살 지가 결정이 됐다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그냥 있는 게 아니라 내가 만드는 것이다.
이미 그 시작부터가 사람들이 만들어낸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을 유지하고 개선하고 지키기 위해,
정치를 의회나 정부에만 맡길게 아니라
일상에서 공적(public)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

지역사회에 더 참여하고,
정치에 관심을 갖고, 시민단체 활동에도 더 열심히 참여해서
직접 민주주의에 더 가까워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지.

그리고 분단 문제를 해결하는 데도 노력하고 싶다.
우리 나라의 많은 문제들이 이 분단 체제에서 비롯된다고 했다.
단순히 땅덩어리가 갈린 문제가 아니다.
한반도의 분단 체제를 유지하는 '냉전 질서',
이것은 우리가 유지하고 있는 것조차 아니다.
우리는 미국의 이익에 의해 분단 되었고, 분단 되어 있다.

그러나 한국의 이데올로기 싸움, 흑백 논리 같이
뭐만 하면 종북, 뭐만 하면 수구꼴통,
이런 식으로 토론조차 안 되는 것은 분단 유지를 위한 이분법적 이데올로기 싸움의
산물이라고 했다.

이런 식으로는 나라가 발전할 수 없다.
조금 더 건강하고 선진적인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일단 토론이 가능해야 하고
민주주의가 가능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라도 나는 통일이 되었으면 좋겠다.

지금의 대통령제에서 조금 더 대통령의 권한이 분산되는
정부 형태가 되었으면 좋겠기도 하다.
대통령의 권한이 너무 세니까 독재적인 성격이 나타나기 쉬운데
그러한 경향은 점점 더 짙어져 가고 있다.
부디 독재정권의 뼈아픈 역사를 잊지 말고,
그것을 제도적인 면에서부터 적용해나가야 한다.

행정부 중심의 나라, 대통령의 나라가 되면
점점 전제 정부와 비슷해져 간다.
의회에 더 권력을 주어야 하고
지방자치가 더 적극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러한 공적인 일들을 생각할 수 있는
민주시민을 키워내는 교육이 중요하다.
경제, 경제, 경제.
나라 자체에서도 경제성장을 가장 큰 이데올로기로 삼으니
교육도 그렇고 개인도 그렇고 오로지 거기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러니 국가 전체가 성장을 위해 굴러가는 건데,
그러다보니 살기 어렵다는 소리가 나오는 것이다.
경제 이외의 삶들을 돌보질 않으니
어떻게 살기 좋을 수가 있겠는가?

당장 나에게 돈만 주고 잘 살아보라고 하고
나머지 요소들 - 교육, 여가, 대인 관계 - 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인프라도 지원을 안 해주면
나부터가 불행할 것이다.
백화점만으로 행복할 순 없지 않은가?

국가도 마찬가지다.
전체적으로 균형잡힌 발전을 이뤄야지
돈만 우수수 떨어진다고 해서 사람들이 행복한 게 아니다.

이건 너무 당연한 얘긴데
성찰하고 행동에 옮길 시간도 여유도 없게 만드는 사회다.

권력 유지를 위한 경제 발전 이데올로기에서 잠시 벗어나서,
정부부터가 국가의 균형잡힌 발전을 위한 의제를 제시했으면 좋겠다.
또한 우리 나라 뿐만이 아니라 국제적으로 중요한 것들도
의제로 다뤘으면 좋겠다.

환경, 평화, 인권의 문제들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한국은 세계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주권국으로서 국제적 이슈와 관련된 논의도 해야 한다.
우리 나라가 잘 살아야 하니까 절약합시다!
는 새마을 운동 시대의 구호다.
지구를 위한 한국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제 성장에 대한 관심을 분배쪽으로 돌려야 할 때다.
이제 더 이상 '일단 돈을 벌고'라는 핑계로 이것을 외면할 때는 지났다.
언제까지 이 논리가 통할 것 같은가?

국민 소득이 2만 불을 넘기고 세계 경제 11위를 차지했으면서
아직도 분배 문제에 신경 쓸 때는 아니라고?
그럼 언제할 건가?
이제 소수의 독점적 성장만으로 경제 성장을 계속할 수 있는 시기도 지났고,
그것이 사회 전체에 이득이 되는 시기도 지났다.

이제는 종전과 같은 방식의 성장이 오히려 사회 전체로 보면 해가 되는 시기다.
나눠주겠다고 약속하고 키워온 파이를 나눠야 할 때다.



.
.

뭐 어쨌든 이런 일련의 생각들이 쭉 정리가 되면서
내 개인의 성공이나, 돈 벌이 같은 것 이전에
내가 속해 있는 이 공동체가 건강해지려면?
을 먼저 생각하며 살기로 했다.

물론 난 부자가 아니다.
지금도 돈이 다 떨어져서 마이너스 카드로 생활하고 있고,
얼른 다시 아르바이트를 구해야 한다.

엄마도 지금 일 하던 공장을 그만둬서 일용직을 나가고 있고,
동생도 휴학하고 아르바이트 중이다.
살기 좋은 쪽이냐 어려운 쪽이냐를 굳이 고르자면
어려운 쪽이다.

하지만 굶어죽을 정도는 아니다.
감사하게도 건강한 탓에 일 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일 할 수 있고
할머니가 살아 계셔서 엄마와 동생은 할머니 집에서 살고 있다.
동생도 건강하고 착해서 일을 열심히 하고 있고.
엄마도 이제는 이혼과 내 성폭력 사건의 충격파에서 조금 벗어나서
꾸준히 구직을 하고 있다.

국가의 소득 분류에 따르자면 0~10단계 중 1단계 정도?
그래도 일을 열심히 해서 돈을 버는 것보다는,
어떻게 살 지를 생각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돈은 내가 굶어죽지 않을 정도,
내가 이렇게 성찰 할 수 있을 정도만 있어도 된다.
당장 입에 들어갈 게 있고 오늘 들어가 잘 수 있는 집,
그 집을 유지할 수 있는 비용,
내가 가장 큰 가치를 두는 일을 할 수 있는 비용 - 학교, 여행 등
약간의 옷,
교통비 등,
내가 한 달 일해 벌 수 있는 돈만큼만 있으면
나는 내가 앞으로 무얼 하고 싶은 지 생각하며
현재를 즐길 수 있다.

그리고 이 상태가 나는 바로 '자유'라고 생각한다.
물론 내가 누리는 자유는 일시적 자유이다.
내가 만약 어디가 크게 아프거나,
다치거나, 아이를 낳게 된다면 나는 당장 돈이 없으므로
큰 곤란에 처하게 된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 다치거나 사고가 나서도 안되고 아파서도 안 된다.
아이도 아직 안 되고.



어쨌든 그래도 나는 지금 내가 앞으로 어떻게 살 지를 생각하고
공동체가 어떻게 하면 함께 발전할 수 있을 지 생각할 여유가 되는데,
그 이유는 내가 필수적인 경제적 요소가 채워져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이러한 이유로 복지와 분배가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개인이 공적인 존재로 살아갈 수 있기 위해서는 개인의 삶이 보장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돈을 버느라 시간이 없어서 뉴스도 못 보고 투표도 못 한다.
당장 빚에 대한 걱정으로, 돈 벌 궁리로,
공동체의 문제에 참여하고 책임 질 여유가 없다.


이럴 때,
사회는, 정치는, 공동체는,
소수의 것이 된다.
소수의 이익을 위한 공동체가 되는 것이다.

개인이 열심히 살아야 하고 경제가 성장해야 한다는 것은,
현재 그 성장의 중심에 있고 자본을 소유한 사람들의 논리이다.

불평등은 자연적인 게 아니다.
그렇게 태어난 걸 어떻게 하냐고?
소유 자체가 제도인데 어떻게 그렇게 태어나나?

지금 땅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땅은 하늘에서 떨어진 게 아니다.
원래 갖고 있었던 사람도 있겠지만,
식민지 시절, 해방 후의 토지개혁으로 얻은 땅들이 많다.




.
.



아 뭐지
교환학생 갈 지 말 지 고민 적으려고 일기 시작했는데 이상한 곳으로 빠졌다.
어쨌든 골자는 이렇게 나를 성장시켜주는 학교를 떠나기가 아쉽다는 것.
하지만 교환학생도 어쨌든 다른 측면에서 성장하기 위해 떠나는 것이다

으아 고민고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