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회: 2890 , 2011-11-21 18:18 |
일이 늦게 끝나 주차장에 차를 대고 들어가는데 바로 옆의 차량에 실내등이 켜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전에 외부에 나갔을 때 나도 모르게 자동차의 실내등이 켜진 채로 일을 보고 돌아왔는데 그만 밧데리가 방전되어 낭패를 본적이 있었다. 그렇지 않더라도 이웃의 실수를 외면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앞 유리창에 적힌 전화번호를 보고 전화를 걸어 자동차에 실내등이 켜져 있는 사실을 알리자 고마워하는 음성을 들으며 집으로 들어왔다. 자신에게 중요한 일이지만 자기의 일을 인식하지 못한 그 사람은 하마터면 아무렇지도 않게 시간을 보내지만 예전의 나처럼 자신의 부주의한 실수 때문에 일어난 일에 대해 값을 치러야 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살다보면 자기의 생각과 한계를 뛰어넘는 곤란한일을 만날 때가 많다. 느닷없이 내차에 달려들어 접촉사고가 일어나거나 상한음식을 먹고 식중독에 걸리는 등 상상외로 어려운 조건들이 우리주위에 많이 있다. 오감을 통하여 접촉되는 일은 자기의 일로 느껴지지만 그 관계를 넘어 일어나는 일은 분명 나의 일임에도 불구하고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처럼 여겨져 모르고 있다가 일이 벌어진 다음에야 수습하느라 곤욕을 치루기도 한다
사람은 마땅히 자기 일에 책임을 져야하고 그런 가르침을 후대에 전해야 한다. 그러나 그 책임의 한계가 모호한 경우에 내 책임이 아니라고 강변해도 책임을 벗어나기 어려운 경우가 많이 있다.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 당연한 자연 순리 같은 이것이 사실은 영적 원리 속에 되어지는 일이다. 인간의 죽음은 모두에게 나타나는 일이지만 사실은 내게 닥치는 일이다. 이 엄청난 사건은 사실은 나와 상관없는 일속에 진행된 고통이다. 먼 오래전에 인간최초의 사람들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리고 실수한 그 결과가 오늘날 우리에게 공평히 나타나는 죽음이다. 왜 내가 참여하지 않은 일에 나의 책임이 이렇게 무겁게 주어지는가가 역사 속에 수없이 되풀이 되어 온 질문이다. 그러나 그 답은 주어지지 않은 채 인간은 오늘도 그 결과의 책임을 따라 죽고 또 죽는다. 존재하는 그분의 위치에 거부할 수 없는 인간은 그가 원하는 방법을 따라야 한다는 사실에 직면한다. 그 진실을 거부하므로 사람들은 종교로 피해보고 우상을 만들어 대항해 보고 철학으로 논리를 삼지만 어느 경우도 승리하지 못해 왔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사는 것은 나의 일이고 죽는 것도 나의 일이지만 죽음은 내가 모르는 일이다. 이런 엉뚱해 보이는 논리에 인간은 종교성외에 어떤 답도 찾지 못해왔다
그러나 성경은 모르는 일에 대한 명쾌한 답을 제시한다. 하나님 떠나 죽음이 왔다면 하나님만나 생명을 얻으면 된다는 것이다. 죽음을 당연히 여기는 인생이지만 복음은 죽음을 죽이므로 죽음이 존재하지 않는 인생으로 만든다. ‘내가 모르는 나의 일’은 고통의 근거가 되지만 ‘내가 모르는 나의 일’ 때문에 우리는 복음을 발견할 수 있는 기회도 된다. ‘내가 모르는 나의 일’ 때문에 두려워하는 이가 있다면 내가 모르는 사이에 문제를 해결해 놓으신 그리스도의 일을 믿고 ‘내가 모르는 나의 일’에 대해 자유 해야 한다. 누가 말해줘야 아는 나의 일이 있듯이 누가 완성시켜줘야 살 수 있는 복음이 있다. 그러므로 ‘내가 모르는 나의 일’이 나를 살리는 것이다.
행복의 편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