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저런 일이 있었다.
나는 괜찮다고 생각하며 버텨 왔지만, 사실 괜찮지만은 않은 일들이었다.
지난 8월,
엄마 아빠는 또 다시 대판 싸움을 벌였고, 이번에는 아빠가 집을 나갔다.
그리고 며칠 뒤, 이혼 서류를 들고 들어왔다.
그리고 둘은 이혼을 했다.
그 과정에서 나는 철저히 방관자로 일임했다.
은근히 부모의 이혼을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아버지의 성폭행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고,
날마다 벌어지는 싸움이 지긋지긋 했다.
그래서 나는 은근히 이혼을 지지하기도 했다.
차라리 따로 살라고.
그렇게 싸울 바에야 이혼하는 게 낫다고.
엄마도 이혼을 결정했고,
둘의 합의 하에 이혼은 이뤄졌다.
갖고 있던 재산은 집 뿐이었다.
통장에도 돈은 없었으며,
있는 것은 우리가 정상적인 가족이던 마지막 달의 카드빚 뿐.
집을 팔아 반으로 나누고
동생은 아빠가 데리고 가 키우기로 했고, 나는 할머니 집에서 살기로 했다.
그렇게 조용하게 이혼은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혼을 한 후에도 우리 가족은 자주 만났다.
아빠가 이사를 할 때는 네 사람이 다 같이 도와 이사를 했다.
마치 다같이 살 집인 것 마냥.
이사를 마치고도 엄마는 동생을 챙기기 위해 그 집에 자주 드나들었고,
우리는 주말에 만나 외식을 하기도 했다.
같이 노래방도 갔으며, 그러고 난 다음에는 아빠 집에서 함께 자곤 했다.
오히려 이혼 후가 좋은 것 같았다.
붙어 있지 않으니 싸우지도 않고
오랜만에 만나니 조금은 반갑기도 했다.
그래, 떨어져 있으니 조금 괜찮아지는 구나.
이제는 다시 좋아질 수도 있겠구나,
하는 조그만 희망까지도 가졌었다.
그렇게 지내던 10월의 어느 날,
공강 시간에 친구와 점심을 먹고 있는데
엄마한테 전화가 왔다.
울먹이는 엄마의 목소리.
아빠한테 다른 여자가 있었다고 했다.
그 여자와 살기 위해 엄마와 계획적으로 헤어진 거라고.
우리 집을 팔아서 나눠가진 돈으로 새로 집을 얻고,
그 여자의 집안에 이미 인사까지 마쳤다고.
이미 오래 전부터 만나왔던 여자였다고.
솔직히 말해서 나는 별로 아무렇지도 않았다.
아빠같은 거,
아무래도 좋았다.
나는 별로 정도 없었으니.
정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증오하는 사람이었으니.
그런데 엄마가 많이 힘들어했다.
배신 당했다는 것에,
그리고 20년이나 같이 살던 남자와 헤어졌다는 것에
많이 힘들어했다.
하지만 나는 같이 힘들고 싶지 않았다.
대학에 와서 나는 정말 행복했다.
이제 막 행복해지려 하고 있었다.
갓,
마음 속에 가득했던 어둠을 걷어냈고
그래서 즐거운 마음으로
밝은 마음으로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기분이 가벼워지니 처음 만난 사람하고도 즐겁게 이야기할 수 있었고
자연스럽게 많은 사람들과 친해질 수 있었다.
그런데 기분이 안 좋아지면
우울해지면
그러면 사람에게 또 다시 마음을 닫아버릴까봐.
철저히 무시했다.
집에서 일어나는 일은.
입으로는 엄마를 위로했지만
나는 나와 집안의 일을 단절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해외 교류 활동을 준비했으며
다음 학기에도 학교를 다닐 생각이었다.
-
그러다가 방학을 맞아 집에 와서 엄마 옆에 누웠는데,
엄마가 많이 힘들어 하는 게 느껴졌다.
상처 입은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이제서야
가정이라는 나의 오랜 울타리가 무너졌으며
부모라는 나의 지붕은,
한 쪽은 날아가버렸고 다른 한 쪽은 무너지고 있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그리고 집 안에 있던 동생이라는 작은 항아리는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 지 도무지 보이질 않았다.
내가 그동안 너무 이기적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학교를 다니지 않기로 했다.
1년 동안 가족들이랑 함께 있으면서
위로도 하고, 같이 겪어내자고 결심했다.
-
그런데 조금은 힘이 든다.
엄마가 중심을 잡지를 못한다.
나와 내 동생은 자식인데,
이제 스물 한 살이고 이제 열 일곱 살인데
마흔 일곱 살의 엄마가 자꾸만 우리보다 어린 모습을 보인다.
자신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다.
자꾸만 운다.
그래, 울 수 있다.
상처받았으니까. 울어야 해.
그런데 자꾸만 나와 내 동생 탓을 한다.
'너넨 지금 신나지. 너네가 뭐가 아쉽겠어. 나만 비참하지.'
'너네가 나를 위해서 해주는 게 뭐야. 자식이면 그 년 찾아가서 머리라도 쥐어 뜯어야 하는 거 아니야?'
'네가 지금 학교 다닐 때야?'
'너 알바 안 해? 알바 해서 엄마 좀 보태 줘.'
제발.
그만.
지붕이 내 위로 무너져 내리려고 하는 것을 느낄 때마다
아득하고 막막하다.
-
나의 지붕은 나보다도 약한 사람이다.
이젠 안다.
엄마는 나보다 약하다.
전엔 이 사실을 몰랐다.
그리고 '우리 엄만 왜 이럴까'라는 생각만 반복했다.
엄마가 좋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일도 많았다.
이제는 알겠다.
엄마가 약한 사람이기 때문에, 아직 다 자라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이제 이 엄청나게 꼬인 집안을,
이 해묵은 감정들을 풀어 나가야겠다.
엄마는 약하고
아빠는 병들었고
동생은 어리다.
할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
그리고 나에게는 그것이 필요하다.
나를 위해.
목 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고
내가 필요하니 내가 할 수밖에.
-
성폭행부터 시작해서
지금 이 일 까지.
제대로 해결된 것이 없다.
모두 어거지로 끼워 맞춰져 있어.
다 제대로 풀어낼 거야.
아빠한테 가서 내 해묵은 감정들, 분노들, 증오들 다 쏟아내고
사과를 받아 낼 거다.
엄마한테도 사과를 받아내고
내가 사과할 것은 사과 할 것이다.
이번 일에 대해서도.
아빠는 도망치듯 내뺐다.
제대로,
엄마가 아빠에게 화를 내고
나도 아빠에게 화를 내고
동생도 아빠에게 화를 내고
아빠도 우리에게 성질이 아닌 '화'를 낼 수 있는 장을 만들 것이다.
그리고 그 해묵고 썪은 감정들을 드러내고
모두들 만신창이가 되더라도
그 상태에서 '대화'라는 것을 해볼 것이다.
그 끝이
어떤 형태이든 그것은 지금 중요하지 않다.
여전히 아빠는 그 여자와 살고
우리는 셋이서 살게 되더라도,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잘못된 매듭을 풀어내는 게 중요한 거니까.
-
힘들 게 뻔히 보인다.
내 상처에 내가 메스를 들이대는 꼴이다.
마취도 없이.
하지만 해야 하는 일이다.
필요한 일이고.
힘내자.
그리고 잘 하자.
예압.
-
구체적으로
1. 성폭행 심리 상담
- 나에게 있어 모든 문제의 시초는 이것이다. 7살 때부터 시작된 아빠의 성폭행. 이것부터.
이 과정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은, 아빠 엄마에게 화내기, 그리고 용서하기.
2. 친척 관계 속에서의 나 파악하기
- 우리 가족의 해묵은 감정들을 정리하기 위해서는 다른 가족들의 도움도 필요하다.
나는 가족들 사이에서는 말을 잘 하지 않는다. 대화도 잘 하지 않고. 모두 좋지만, 뭐랄까 항상
주눅이 들어 있다. 숫기가 없는 것 같기도 하고. 다른 가족들과 소통을 잘 해서 함께 해 나갈 수 있도록
해야겠다. 이모네랑도 자주 왕래하고, 다같이 모일 자리가 있으면 그 기회를 놓치지 말고 나를 잘
관찰하고 치료해보자.
3. 건강한 권리 의식 찾기
- 나는 뭐랄까, 권리 의식이라는 게 없었다. 이런 개념이 있다는 것도 얼마 전에 책을 보면서 알았다.
'건강한 권리 의식의 부재'도 심리적인 문제라고 했다. 나는 용돈을 타면서도 항상
'내가 왜 남이 번 돈을 뺏어 쓰지?'하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아빠가 나를 때리는 것도 '때릴 수도 있지, 뭐'
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엄마가 학교를 다니지 말라고 햇을 때도, '내가 다니는 건데 부모가 내줄 이유가 없지.'라고 생각했다. 엄마가 내 옷을 사줄 이유도 없다고 생각했으며, 아빠가 나 때문에 일을 할 이유도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꼭 그런 것만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에야 성인이니까 그럴 수도 있지만, 나는 중고등학교 때부터 이런 생각을 해왔다. 중고득학생은 부모가 보살펴줄 수도 있지 않은가? 나는 뭔가 내가 당연히 받아도 되는 것이 있다는 생각을 못한다. 그래서 언제나 내 것은 내가 알아서 하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리고 이 권리에는 무언가를 받을 권리만 있는 것은 아니다. 쾌적한 생활을 할 권리,도 있다. 엄마 아빠에게 제발 좀 그만 싸워라, 듣기 싫다. 라는 말을 해본 적이 딱 한 번 밖에 없다. 엄마아빠 집이고, 엄마아빠가 싸우는 것은 자기네들 일이므로, 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아직 뭐가 문제고 뭘 어떻게 해야 맞는 건지 정리는 안 돼지만, 어쩄든 나는 나의 권리가 어디까지인지 알 필요가 있고, 나한테 당연히 있는 권리를 내가 지금까지 몰랐다면 되찾을 필요가 있다.
이 정도인 것 같다.
지금 당장 내 눈에 보이는 것은.
후아후아
심호흡 하고.
마음은 스탠바이 시키고.
눈물도 스탠바이.
기대되는 결과물은
성장
수동적인 성격으로부터 벗어나는 것.
해묵은 증오와 분노의 해소.
그리고 진정으로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
-
나는 사랑 받아본 기억이 없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어색하다.
그런 건 받지도, 주지도 않는 게 익숙하고 편하다.
최근에는 사랑이라는 것을 먼저 해보려고 노력하지만
잘 되질 않는다.
아빠는 사랑할 수 없다.
엄마를 사랑해보려고 하는데
한 가지, 딱 한 가지 때문에 자꾸 걸린다.
나는 엄마에게 화가 나 있다.
엄마는 아빠와 같이 살 때
아빠가 술을 먹고 화를 내면 언제나 혼자 도망갔다.
혼자 남겨진 나는
맞거나
성폭행을 당했다.
동생은 있으나 마나였다. 너무 어렸으니까.
그리고 아빠가 나를 성폭행했다는 것을 엄마가 안 뒤에도
엄마는 아빠와 이혼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 뒤로도 5년이나 성폭행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엄마는 내가 받은 상처를 치료하기 위한 그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았다.
이해가 안 가는 노릇이다.
자식이 아버지로부터 성폭행을 당한 사실을 알았고
목격까지 했다면
최소한 내가 어떤 상처를 입었는지 살펴야 한다.
심리 상담을 받게 하는 것도 엄연히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엄마는 그 어떤 시도도 노력도 하지 않았다.
그 일은 철저히 묻혀졌다.
절대로 우리 집의 화제에 오르는 일이 없었다.
마치 없었던 일처럼.
그래서 나는 엄마에게 화가 나 있는 모양이었다.
최근에 깨달은 것이지만.
하지만 말했듯이
엄마는 나보다 약하다. 그리고 명백히, 어리다.
슬픈 일이고
아득한 일이지만
나는 내가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모부가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외람되는 줄 알지만
너희 부모는 부모 자격이 없다.
너희 남매는, 부모가 키워준 게 아니라,
너희가 알아서 자란 거다.'
도저히 잊혀지지가 않는다.
내가 항상 해오던 생각이었다.
나는 식물처럼, 혼자 자랐다고.
-
아직은 잘 정리가 되지 않는다.
조금 더, 여유를 가지고 정리를 해봐야겠다.
지금 내가 처한 상황과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