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티아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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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20 04:53
나를 멈추게 하는 것들 / 반칠환
보도블록 틈에 핀 씀바귀 꽃 한 포기가 나를 멈추게 한다
어쩌다 서울 하늘을 선회하는 제비 한두 마리가 나를 멈추게 한다
육교 아래 봄볕에 탄 까만 얼굴로 도라지를 다듬는
할머니의 옆모습이 나를 멈추게 한다
굽은 허리로 실업자 아들을 배웅하다 돌아서는
어머니의 뒷모습은 나를 멈추게 한다
나는 언제나 나를 멈추게 한 힘으로 다시 걷는다
- 시집『뜰채로 죽은 별을 건지는 사랑』
93.
티아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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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17 16:48
눈 속의 바다 건너/ 유안진
풀잎 하나에 가을이 내려와 주고
비누 방울에도 무지개가 걸려 주는 이 땅에 태어나
병 되는 줄 알면서도 사랑을 하고
죽을 줄 알면서도 살아들 가는 중에 나도 끼여 있다
인생을 사느라 인생을 팔았고
시간을 아끼느라 시간을 낭비했던
열정은 수난의 맨발이었고
그리움은 눈먼 황홀이었다
여기를 보고 있어도 저기를 보는
뜬눈보다 보다 멀리 보는 눈먼 큰 눈을
딱부리 사팔뜨기 사발눈이라고들 하지만
눈 속에 출렁이는 바다는 아무도 보지 못한다
밤마다 외눈등대에는 불이 켜지고
태풍이 불고 파도가 끓어 넘쳐 뒤집히기도 한다
나의 왕국은 여기 아닌 끓는 바다건너 저기니까
나의 시대는 훗날 언제이니까
눈동자 너머의 저기로 가는 희망 봄
새 우주 새 행성의 신대륙으로 가는 길
물길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
뜨거운 내 눈물, 그 외길 밖에는,
- 시집<거짓말로 참말하기>(천년의시작, 2008)
92.
티아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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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17 15:55
봄비, 간이역에 서는 기차처럼/ 고미경
간이역에 와 닿는
기차처럼 봄비가 오네.
목을 빼고 오래도록 기다렸던
야윈 나무가 끝내는 눈시울 뜨거워져
몸마다 붉은 꽃망울 웅얼웅얼 터지네.
나무의 몸과 봄비의 몸은
한나절이 지나도록
깊은 포옹을 풀지 못하네.
어린순들의 연초록 발바닥까지
스며드는 따스함으로 그렇게
천천히, 세상은 부드러워져갔네.
숨가쁘게 달려만 가는 이들은
이런 사랑을 알지 못하리.
가슴 안쪽에 간이역 하나
세우지 못한 사람은
그 누군가의 봄비가 되지 못하리.
- 시집 『인질』(문학의전당. 2008)
91.
티아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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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17 15:47
매일초/ 호시노 토미히로
오늘도 한 가지
슬픈 일이 있었다.
오늘도 또 한 가지
기쁜 일이 있었다.
웃었다가 울었다가
희망했다가 포기했다가
미워했다가 사랑했다가
그리고 이런 하나하나의 일들을
부드럽게 감싸주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평범한 일들이 있었다.
- 시화집 《내 꿈은 언젠가 바람이 되어》
90.
티아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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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17 15:11
예술은 협잡이고 사기다/ 이승훈
예술가들은 자기방어에 실패한 자들이 많고 언제나 신경증 히스테리 강박증과 싸워요. 그럼 창조행위란 뭐
냐? 그건 방어 실패를 극복하는 행위예요. 병 때문에 시를 쓰고 시를 쓰며 병을 치료한다. 역설이지. 병
이 병을 치료하는데 과연 치료되는가? 쓰러져가는 이 낡은 건물, 나의 협잡, 신경증에서 벗어날 수는 있지
만 나를 치료할 수는 없다. 사르트르의 말입니다. 병이 든 나는 쓰러져가는 낡은 건물이고 글쓰기는 한 마
디로 협잡이다. 예술은 사기, 속임수, 기만이라는 거야. 그러니까 일생 가요. 정신병은 일생 가는 겁니
다. 치료는 무슨 치료?진정제 먹고 견디죠. 시쓰기가 진정제야. 그런데 멀쩡한 인간들이 무슨 시이고 예술
입니까? 그런 인간들은 정치를 하거나 장사를 하면 돼요.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일생을 정신분열증에 시
달리고 그걸 극복하기 위해 완벽한 논리에 매달렸죠. 논리는 외부 세계를 단념하는 방법이야. 시쓰기도 세
계를 단념하고 체념하는 방법으로 나가야 하고, 마침내 쓰러져가는 이 낡은 건물도 환상이라는 걸 깨달아
야 합니다.
-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2010년 9~10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