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fore sunrise   trois.
  hit : 2745 , 2013-08-03 13:19 (토)



아무것도 할 일이 없어
TV 채널을 이리 저리 돌리다가
Before sunrise라는 영화를 만났다.


한 번도 본 적은 없지만
꽤나 익숙한 영화였다.
바로 전 남자친구가 꼭 같이 보자고
늘 이야기했던 영화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귀기 시작했던 시점에
영화관에서는 한창 Before midnight이 상영 중이었다.
그는 그 영화를 참 보고 싶어했지만
Before sunrise와 Before sunset을 보고 봐야
제대로 볼 수 있다며
나중에 그 세 영화를 꼭 같이 보자고 이야기하곤 했었다.


그가 이야기하는 영화의 분위기가 나도 참 마음에 들어서
여유가 생기면 꼭 같이 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다.



.
.


어떤 영화일까, 궁금한 마음이 들어
이제 시작한 지 십오 분쯤 된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처음 보는 여배우와
익숙한 에단 호크.
어떤 다리 위에서 두 남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제 막 비엔나에 내렸는데 뭐 재미있는 일 없느냐며,
묻고 있었다.


줄거리는 대충 들었기에
아, 이제 막 같이 기차에서 내렸구나,
하는 짐작을 했다.



그 둘은 이곳 저곳을 다니며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사실 둘이 특별한 걸 하지는 않은 것 같다.
그저 아주 일상적인 것들을 했지만
그 일상적인 것들을 함께 하며 나누는 대화들이 참 재미있었다.
사실 대화 자체도 아주 일상적인 대화이지만

처음으로 만나
서로가 가진 생각들에 대해 가감없이 털어놓는
그런 자연스러움과 
뭔가가 통한다는 느낌이
꽤나 간지러웠던 것 같다.

그런데 영화를 보면 볼수록
전 남자친구가 나에게 가졌던 환상,
같은 것이 느껴졌다.


그러니까,
나와의 관계에서 가졌던 
환상이랄까.




전 남자친구와 나와의 관계도
어쩌면 약간의 환상이 가미된 관계였다.
서로 알게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서로 만남을 갖게 되었고,
만나면 정말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랜 시간은 아니었지만
내 일과가 끝난 밤 시간에 
두 시간, 세 시간 쯤
벤치에 앉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었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에서부터 시작해서
온갖 관심사에 대한 이야기들.
웬만해서는 잘 털어놓지 않는 본질적인 문제들에 대해서도.

그런 로맨틱한 관계에 대한 환상이 있었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이 영화를 아주 좋아했고
아무리 보아도 영화 속 주인공들이 만나는 방식이
나와 그가 만나던 방식과 흡사했기 때문이다.



그가 나와 했던 것들 중 
아주 좋아했던 것들이 몇몇 보였다.
아주 사소한 것이지만-



.
.

뭐,
무리한 생각일 지도 모르겠지만
그냥 느낌일 뿐.

이 영화를 보면서 아직도 그 사람을 생각하는 나는
어쩔 수 없이, 
쓸데없이 감성적인 아이인듯.


얼마 전 들어가본
남자친구의 전 여자친구의 엄마의 페이스북.
(이런 식의 연결이 가끔은 소름끼칠 때도 있다.)

나와 한창 만나던 때에
전 여자친구, 전 여자친구의 엄마와 여동생, 그리고 
나의 남자친구가
함께 찍은 사진들을 보았을 때 느꼈던


'싸가지 없는 새끼'
라는 욕은 어디로 가고
무언가 가련한 느낌이 남았다.


어렸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엄마와 자랐다는.
엄마는 따뜻함이 없었어서
가정의 따뜻함이 참 그립다는,


그 말들을 떠올리며
전 여자친구의 가족들이 주는 따뜻함을 쉽게 떨치지 못하는 걸까,
그렇다면 참 가련하다,
는 생각을 해본다.

누구보다도 강하고
누구보다도 더 현명한



척 했던,
그래서 참 커보였던 그가
내 무릎으로 기대어 쓰러지는 순간이었다.





.
.



영화는 그저 그랬다.
딱히 화면이 좋지도 않았고
하도 많이 들어서인지
구성도 뻔했다.

여배우는 참 예뻤고
에단 호크는 내 취향이 아니고
중간 중간에 나오는 감성적인 포인트들도
내 취향은 아니었다.

시를 지어주고 돈을 받는 거지라든지
점을 봐주는 노파라든지
공짜 와인을 받는다든지,

낡은
낭만코드랄까.




.
.





인상깊었던 점은
이 낭만을 받아들이는 
여자와 남자의 차이였다.

점을 봐주는 노파를 만났을 때
여자는 참 멋진 일이라고 감탄했지만
남자는 원래 점쟁이들은 다 좋은 말만 한다고 이야기했다.

시를 지어주는 거지를 만났을 때
여자는 참 멋진 시라고 감탄했지만
남자는 원래 지어놓았던 시일 거라고 이야기했다.

사실 남자가 했던 종류의 말들은
늘 나를 상처입히는 말들이었다.


'어떻게 저렇게 생각할 수가 있지?'
라고.



뭐,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생각의 차이일 뿐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받아들일 수도 있고
저렇게 받아들일 수도 있는 거라고.
그리고 
남자들은 종종 저렇게 받아들이기도 한다고.

아니,
종종보다는 조금 더 많을 수도 있고.



아무튼 굳이 내가 상처받을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
.








그리고
굳이 Before sunset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李하나  13.08.04 이글의 답글달기

그렇게까지 오래된 줄은 몰랐어요. 새삼 놀라게 되네요:)

꿈과 희망  13.08.04 이글의 답글달기

우와 모르던것들을 알게되었네요.
저도 좀 봐야겠어요.시리즈로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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