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풍경   trois.
  hit : 2355 , 2013-08-06 19:48 (화)





학교에서 집으로 오는데
갑자기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억수라는 말로 다 표현이 가능할까,
천둥도 어마어마하게 치고.

무슨 일이 일어날 것처럼 비가 퍼부어서
지하철을 타는 것도 겁이 났다.
그래서 역사 안에 있는 카페에 들어가서
따뜻한 초코치노를 하나 시켜놓고
젖은 신발을 벗어두고
책을 읽었다.


오랜만에
김형경의 사람풍경,
을 꺼내들었다.
예쁜 하늘색 표지가 언제나 마음에 드는 책이었다.
요즘 하도 습해서
책이 주글주글해져서 조금 아쉬웠지만
그 나름대로 손맛이 있어서 
또 좋았다.


.
.


무의식
사랑
부분을 읽으면서
오랜만에 많은 생각을 했다.
정신 없이 보냈던 4개월 동안
잠시 접어두었던
생각들.



메모를 할까 생각했지만
정말 기억할 만한 가치가 있다면
나중에 다 기억이 나겠지,
하고 적어두지 않았다.

이 글을 쓰다보면
필요한 것들이 기억이 나겠지.



.
.

책을 읽다가
가끔은 허공에 시선을 잠시 걸어두고
생각에 잠길 때,

다시 내가 차분한 상태로 돌아왔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니까,
내가 나 자신을 충분히 다룰 수 있는 
그 상태로.


치열했던
4개월 동안은
나도 나를 어떻게 할 수 없는 순간들이 많았다.
나조차도 나를 모르겠고
알겠더라도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었던 적이 많았다.
그럴 때면 많이 곤란했고
힘들었다.



아주 오랜만에
차분하게 나 자신을 들여다보고 관조하는 시간이 찾아왔다.
아마 내 나라
내 공간이 주는 여유,
일 것이다.



그리고
내가 왜 자꾸만 일상을 치열하게 만드려고 하는 지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 사이에 있지 않고 혼자 있거나
바쁘고 치열하게 할 일이 없을 때는
내 마음의 지도가 아주 명료하게 드러난다.

하지만 
사람들 틈에서 부대낄 때
새로운 일을 하면서 끊임없이 나 자신의 한계에 부딪힐 때는
나는 마음의 지도 따위 같은 것도 갖지 못한 채
내 마음의 세계에서 헤매게 된다.

그렇게 나를 잃고 헤매다 보면
내가 꾸미고 일궈놓은 
바람직한 내 모습이 아니라
저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숨겨뒀던 나의 모습들이 올라온다.




예를 들면
나는 외모와 나 자신에 대한 자존감을 어느 정도 회복한 상태였다.
외양을 꾸미게 되면서.

그런데,
필리핀에서는
꾸밀 수도 없었고, 꾸미려 하지도 않았다.
외양을 꾸밀 수 없었을 때
나의 자존감은 다시 한 없이 추락했다.
사람들이 나를 못 생기게 볼 것 같았고
나를 싫어할 것 같다는 두려움에 시달렸다.

정확히
출발점으로 다시 되돌아간 것이었다.


이럴 때마다
내가 아무리 벗어나려고 해도
극복하려고 해도
그 원형,
발화점은 내 안에서 아직도 시퍼렇게 살아 있다는 것을 느낀다.




.
.


나는 그 시퍼런 발화, 
를 맞닥뜨리는 것이 참 좋다.
물론 그 당시에는 불편하고 벗어나고 싶고
불쾌하고 불안하지만,

그 주제로 치열하게 고민할 수 있게 된다.
임시방편으로 덮어두고 산다고 해서
해결된 것이 아님을
간과하지 않을 수가 있다.




그래서 
나를 새로운 곳에 던져 넣는 일
사람들 속으로 밀어 넣는 일
을 그만둘 수가 없나보다.




-



사랑,
사랑이라는 감정을 떠올려보려고 해도
쉽사리 되질 않는다.
사랑할 만한 대상,
으로 가장 일반적인 엄마를 떠올려 보면


'미워!'
라는 말이 먼저 떠오른다.
이내 아빠가 따라 나오고
가슴 속은 분노로 가득찬다.


내 감정의 원형은
분노와 미움이다.
내 심장을 채우고 있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증오다.


그 심장을
사랑을 가득 담은 혈액이
열심히 드나들고 있다.


덕분에 내 온 몸에는 사랑이 있을 수가 있지만
심장만큼은 아직도 미움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사랑을 담은 나의 혈액은
심장을 지나면서
어쩔 수 없이 미움과 증오를 담아 여행을 떠나게 된다.




어떻게 하면 내 심장에 쌓여 있는
증오와 미움을 희석시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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