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과의 역사 1   quatre.
  hit : 2904 , 2014-02-27 22:48 (목)


자살과의 역사는,
사이 좋게 지내기로 하면서 평화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학교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던 어느 날이었던가,
지하철에 앉아서 여느때와 다름 없이
'이제 죽고 싶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렇게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한 게 참 오래되었는데,
나는 아직까지 이렇게 살아있고
심지어 제대로 자살시도를 해본 적도 없다.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 걸로 따지면야

초등학생 때였으니
10년이 넘게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살았던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언제나 다시 삶에 욕심을 냈다.

이로 미루어 봤을 때,
남은 삶에서도 나는 여전히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할 수는 있겠지만
적어도 절대로 죽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내가 어렸을 때 겪은 것보다 더한 일은
이제 살면서 아마 거의 없을 건데,

나는 그 속에서도 삶에 욕심을 냈기 때문에
앞으로 사는 동안에도 
죽고 싶어하는 것만큼이나 살고 싶어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는 죽지 않을 거면서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살거라는 건데
이 무슨 쓸데없는 짓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
.



이 날과는 다른 날이었는데,
역시 지하철에 앉아 있을 때였다.

너무나 습관적으로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데
결국 죽지는 않는데,
그리고 기분이 좋아지면 다시 죽고 싶다는 생각이 사라지는데,

과연 내가 지금 죽고 싶은 게
정말 죽고 싶은 걸까? 




어쩌면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
를 '죽고 싶다'로 표현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리고 그 다음부터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면,
당시의 상황을 넣어서

'_____하게(해서, 하면서) 살고 싶지 않다'
라는 문장으로 바꿔 생각해보았다.



엄마가 나를 아빠에게 데려가서 절망적이었던 날,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 때
'엄마가 나를, 내가 고소한 아버지에게 데려가는 이런 상황에서
살고 싶지 않다'
라고 바꿔보았다.


죽고 싶다나,
살고 싶지 않다, 나
언뜻 보면 비슷해보인다.

하지만 단지 죽고 싶다고 이야기했을 때와
어떤 이유 때문에 죽고 싶다,
라고 이야기했을 때는 완전히 느낌이 다르다.
전자에는 다른 선택이 없지만,
후자에는 선택의 여지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엄마가 나를, 내가 고소한 아버지에게 데려가는 이런 상황' 때문에
나는 죽고 싶은 것이며 
그렇지 않은 세상에서 '살고 싶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엄마가 나를, 내가 고소한 아버지에게 데려가는 상황이 없는 곳에서 살고 싶다.'
살고는 싶은데 상황으로 인해 살고 싶지 않아진다면
상황을 바꾸려고 노력하거나, 상황에 대한 생각을 바꾸면 되는 것이다.
죽지 않아도.
그리고 


나는 '다르게 살고 싶은'것이지
'죽고 싶은'것이 아니다.


지금은 기분이 안 좋아도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횟수가 많이 줄어들었다.
그리고 간혹 들었다가도,
내가 바로 다른 문장으로 대입해버린다.



이 문장 구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구체적인 이유가 붙는다는 것이며,
'죽는다'라는 동사를 쓰는 게 아니라
'살고 싶지 않다'라는 동사를 쓰는 것이다.





1단계

'죽고 싶다' => ' ___ 때문에 살고 싶지 않다'


2단계

' ___ 때문에 살고 싶지 않다' => '___가 없는 곳에서(하지 않는 곳에서) 살고 싶다'



그러면 
어찌되었든 결론이 '살고 싶다'로 바뀌게 되어 있다.
그리고 나는 이것이 실제로 내가 원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표현을 잘못하고 있었을 뿐.




.
.


또 다른 날엔,
삶의 이유와 죽음의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
어떻게 사고(思考)가 진행되었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그냥, 문득 깨달았던 것 같다.
이런 질문으로 시작되었었다.



'나무는 왜 살까?'



사람들은 왜 사는 지 이유를 대느라 여념이 없다.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정의 내리고 싶어하고
자신의 삶이 의미있기를 바라며,
'나는 어떤 사람이 될 것이다'라며 꿈과 포부를 밝힌다.
나 역시도.

그렇다면 나무는 왜 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보기에 나무가 하는 일은 봄이 되면 새 잎이 피었다가
여름에는 열매를 맺고 가을에 낙엽이 지고 겨울에는 다 떨어져버리는,
그 과정을 반복할 뿐이었다.
여기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러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무는 그냥 그러려고 사는 거라고.
그냥 그렇게 내가 보는 그대로,
그리고 내가 보지 못하는 어떤 자신만의 것을 하기 위해
그냥 살고 있는 거라고.

그것만으로 나무는 수 백년 혹은 천 년을 산다.
그렇다고 해서 나무가 살 가치가 없는가? 
그건 아니다.
나무는 그 자체로 그냥 살면 되는 것이다.


새를 보면서도 마찬가지의 생각을 했었다.
하루 종일 지저귀고 날아다니고 가끔 먹고, 
짝짓기를 하고 둥지를 짓고,
그냥 그러기만 하는데
새는 뭐하러 사는 걸까? 
새의 삶에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리고 마찬가지로
새는 그냥 그러기 위해서 산다.
날아다니고, 전깃줄이나 나무 위에 앉아 있고,
새끼를 낳고, 기르고, 다시 짝짓기를 하기 위해.
내가 보는 모습 그대로 있기 위해,
어쩌면 내가 모르는 그 무언가를 더 하기 위해,



단지 자신이 하고 있는 그대로를 하기 위해 평생을 산다.
그렇다면 새의 삶에는 무슨 의미가 있는가? 
별로 의미가 없어도 상관 없다.
새는 그냥 그 자체로 살면 되는 것이다.




사람도 역시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 사냐', '무엇 떄문에 사느냐'
'삶이란 무엇이냐'
라는 질문을 산 사람으로부터나 죽은 사람으로부터나 참 많이 들었고
그것을 생각하고 찾아야만 한다고 들었지만,

나는 사람이 사는 데도 별다른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저 숨쉬고, 먹고, 싸고, 걸어다니고, 말하고, 섹스를 하고, 새끼를 낳고, 기르고,
또 다시 섹스를 하고, 
그냥 그러기 위해서 사는 것이다.
그냥 사람이라면 하게 되어있는 그런 행동들,
눈을 깜빡인다든지, 
앉아 있다든지, 물을 마신다든지.



삶에 이유가 붙으면
삶이 조건화되어 버린다.
'___ 때문에 산다'
는 결국 



'___ 하지 못해서(가 없어서) 죽는다'라는 문장을 만들어내버리고 만다.
살 이유를 만든 결과
죽을 이유 역시 생겨버린 것이다.



이 역시 내가 죽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들과 맞아떨어진다.
사람은 행복하기 위해 산다는데,
나는 행복하질 못하다.
그래서 나는 죽고 싶다.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산다는데,
나에게는 사랑하는 사람이 없다.
사랑할 수 있는 사람도 없고, 사랑하는 방법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나는 죽고 싶다.






하지만 살 이유가 없다면
죽을 이유가 없다.
삶과 죽음을 절대화시켜버리면 되는 것이다.

살아 있는 이유는 단지 살기 때문이며
죽는 이유는 오직 하나,
죽기 때문이다.

내가 태어나는 것에 나의 의지가 없었고
살기 시작한 것에도 아무 이유가 없었는데,
죽음은 왜 내 손에 떨어진단 말인가? 

죽음이 내 영역이려면
탄생 역시 내 영역이었어야 한다.
그러나 나는 내 의지 없이 태어났으며
그렇다면 죽음도 none of my business다.








.
.


이 세 가지 추론의 결과
자살과의 싸움은 소강 상태로 접어들었다.
'끝났다'고 말하지 못하는 이유는
아직 내가 살 날이 꽤 많이 남았을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언제 뒤집힐 지 모르기 떄문에.

어쨌든 지금은 나는 그다지 죽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하지 않는다.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도,
그게 내가 진짜 죽고 싶은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었기 때문이며 
때문에 나는 아무리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더라도
결국에는 죽지 않을 것임을 잘 안다.

무엇보다도 죽음은 내 영역이 아니다.
내가 선택할 일도 아니다.
나는 그저 내가 죽게 될 때까지 살아 있으면 되는 것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으면 고민할 이유도 없어진다.
가장 크고 심오하며 에너지 소비가 심한 고민 한 가지가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살아야 하는 가 말아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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