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번째 일기 │ 일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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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맛있는 음식을 처음 먹을 때 행복함이 100%라면 그 다음번에 먹었을 땐 100보다 적게, 그 다음의 다음은 더 적게 어쩔 수 없이 무뎌지고 익숙해진다 슬픈 것도 그런 것 같다 와 진짜 죽을 만큼 힘들다 죽어버리고 싶다라고 느꼈을 때 우울함이 100%라면 그 다음에 느꼈을 땐 그거보다는 적게, 그 다음의 다음은 더 적게 우울하고 슬픈 마음이 누적되는 게 아니라 역설적이게도 점점 무감해진다 난 더 슬퍼질 줄 알았는데, 그냥 덤덤해진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더 더 힘들고 마음이 찢어질 것 같은데 왜 멀쩡하지? 미친년처럼 머리를 쥐어뜯고 술담배를 잔뜩 하면서 망가지고 싶은데 아무 생각이 들지 않는다 아무 감정도 들지 않고 그냥 조용히 누워서 휴대전화만 들여다 본다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고 아무 감정도 느끼고 싶지 않아서 일부러 무의미한 영상들을 보면서 나를 분리 시킨다 제3자의 시선으로 내려다 보면 내 몸뚱이는 누워 있지만 내 영혼은 자꾸만 몸에서 빠져 나가고 있는 기분이 든다 죽고 싶다, 죽이고 싶다 라는 말을 정말 잘 하지 않으려 한다 진심이 아니니까... 그 정도는 아니니까 후회하지 않으려고 그러는데 요즘은 자꾸 그냥 지금 죽어도 아무렇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아무렇지 않을 것 같다고 자신할 순 없고, 그냥 그럴 가능성이 조금씩 올라가고 있다 아무 생각이 없어서, 아무 느낌이 들지 않아서 그냥 다 놔버리고 싶다는 문장만 머리에 둥둥 떠 다닌다 놀랍게도 20번째 일기에서 썼던 것의 연장선으로 나는 새로운 일자리를 구했고 연인과도 잘 지내고 있지만 그럼에도 내가 사라지는 상상을 멈출 수가 없다 아빠는 도박 중독에 수시로 거짓말을 하며 내 결혼 자금이 될 일부를 빌려가 돌려주지 않았고 엄마는 알콜 중독에 유년시절 복불복처럼 나에게 폭력을 휘둘러 맞고 도망가고 별 수난을 다 겪었다 난 불완전한 인간으로 태어나 불안정하게 컸고 내 마음은 수시로 불안해진다 나를 왜 낳았냐든가 왜 이리 책임감이 없냐든가 그런 무의미한 외침은 더 이상 하고 싶지도, 할 힘도 없다 이미 난 태어나졌고 시간이 등을 떠밀어 자라버렸다 왜냐는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기엔 너무 늦어버렸다 어릴 때 사고라도 한 번 쳐볼걸 부모 속이라도 한 번 썩이고 관심이라도 좀 끌어볼걸 하도 부모 눈치를 보고 자라서, 애가 너무 일찍 철이 들어서 쓸데 없이 빨리 의젓해졌다 이렇게 살지 말걸 사라지고 싶다 아무한테도 피해를 끼치지 않고 그냥 증발해버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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