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쳐가는,   deux.
  hit : 2701 , 2012-01-21 17:15 (토)




이제 곧 설이네요.

아버지와 엄마가 이혼하고

아버지와는 따로 떨어져 산 지 어언 두 달.

그 동안 서로 연락도 한 번 안 했는데

설에 같이 시골에 내려 가자고 연락이 왔네요.



차라리 영영 안 만났음 했어요.

싫기도 했지만

감정의 타래들을 건드릴 엄두가 나질 않아서.

그냥 만나지 않고 지냈으면 했는데

내일이면 또 만나게 되네요.



내 안에 이렇게 커다랗고 징그러운 증오가 불타고 있다는 게 싫어요.

누군가를 죽이는 상상이 아무런 아픔 없이 가능하다는 것이,

싫어요. 

내가 불쌍해요.



그래서 차라리 마음 놓고 이 분노를 터뜨려서

내가 그렇게 미워하는 그 사람을 상처주고 싶은데

내 안에서 이 더러운 분노들을 다 방출시키고 싶은데

도대체 왜 그게 안 돼는 걸까요? 



그 사람은 평생을 주변 사람들에게 잘도 상처를 주면서 살아가는데

나는 왜 한 사람에게 상처주는 것도 이렇게 벌벌 떠는 걸까요.

나에게 준 상처를 되갚아 주는 것도 못 하겠다며

이렇게 착한 척을 하는 걸까요? 



착하면 뭐 얼마나 착하다고.

그렇게 착하지도 않으면서.

모진 소리를 하고 싶다가도

그래도 이십 년 동안 열심히 일 한 것이 생각나고

이 집에서 나는 돈 버는 기계일 뿐이라고 이야기하는 그 등이 생각나고.

망할.

당신이 이 집에서 기계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당신이 나를 무참히 짓밟았고

그래서 나는 당신이 증오스러웠고

그래서 당신을 싫어했기 때문이야.



당신이 매일 밤 늦게까지 일하는 걸 나는 알고 있었고

일편 고마운 마음은 들었지만

그런 고맙고 안쓰러운 마음은 하루도 안 가 뒤집어졌어.

당신의 행동으로 인해.



나에 대한.

당신의 아내에 대한.

그리고 당신의 아들에 대한

그 행위들로 인해.



나는 당신이 미워.

증오스러워.

만나고 싶지 않아.



하.

이렇게 말해 버리고

다시는 만나지 않든지

아니면 한 대 맞든지

아니면, 정말 어쩌면 사과를 받든지.

어떻게 되든지 털어버렸으면 좋겠는데.



잘 되지를 않는다.



아무튼 내일은 두 달여 만에 아버지를 만난다.

창자부터 불쾌한 감정이 끓어 오른다.

어떻게 대해야 할 지도 잘 모르겠다.

쌀쌀맞게 대할 수도 있다.

하지만 두 가지가 걸린다.

연민.

딸에게 모진 소리를 듣고 상처받을 그 마음에 대한 연민.

그리고 내 동생.

나만큼 아버지를 증오하지는 않는,

한편으로는 조금은 아버지를 좋아하는 내 동생이

내가 아버지에게 모질게 대하면

자신이 아버지에게 잘 해주고 싶은 그 감정에 대해

죄책감을 갖지 않을까, 내 눈치를 보며 그 감정을 숨기지나 않을까.

자신의 뜻과는 상관 없이 아버지와 척을 지게 될 그 아이가 불쌍해서.

남자 아이인데,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배울 것이 많은 아이인데

아버지와 같이 살지 못하고 

엄마와 누나라는 드센 여자들 사이에서 사는 그것만도 불쌍해서.

아버지와는 너무 척지지 않았으면 해서.

그래서 더 모진 소리 못 하겠기도 하고.









도대체

사람은 왜 다른 사람의 감정까지 헤아리는가.

나는 왜 

주변의 모든 사람의 감정이 

내 감정인 듯 느껴지는가.

아무리 외면해도

나와는 상관 없는 일들이라고 문을 닫아버리려고 해도

되지를 않는다.

문을 닫아버리는 바람에

다른 사람들이랑 감정 교류하는 게 어려워져 버렸는데

정작 이럴 때는

제대로 작동하질 않는다.



제발

내 감정 하나만 느껴졌으면 좋겠다.

엄마의 감정

내 동생의 감정

아버지의 감정이 나에게 전해져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냥,

머리로만 살았으면 좋겠다.

감정이라는 건

정말이지 고통스러운 느낌이다.

이해라는 건, 공감이라는 건

없애버리고 싶은 기능이다.



-



모질어졌으면 좋겠다.

약아졌으면 좋겠어.

나빠졌으면 좋겠다.

득달 같아 졌으면 좋겠다.



사람과 상황을 이용할 줄 알았으면 좋겠어.

아주 가끔씩이라도,

몇 번 만이라도,

머리와 마음이 따로 움직여줬으면 좋겠다.



하고 싶지 않더라도

해야 한다면

할 필요가 있다면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



좋은 감정들까지 버리고 싶지는 않지만

어느 한 쪽만 가질 수는 없는 거라면,

차라리 좋은 감정이든 나쁜 감정이든

아예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다.

사랑 같은 거 이제는 안 해도 좋으니까

다시 닫아버릴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언젠가는 그치겠지, 라고 생각하면서 조금씩 열어갔었다.

조금만 더 버티면 이제는 감정이 상처 입을 일은 없겠지, 하고.

중학생만 되면,

고등학생만 되면,

대학생만 되면,

어른만 되면,

부모가 이혼만 하면,

기다리고 또 기다렸지만

힘든 일들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이제 좀 괜찮다 싶으면

또 다시 터지고,

조금 수그러든다 싶으면

또 다시 펑.



차라리 닫는 게 나을까.

평생을 이기적으로,

무감각하게 사는 것이 나을까.





-



내 마음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소리.

애써 위로하려 하지만

이제는 내가 나를 위로하는 것도

내가 나를 다독이는 것도

내가 나를 치료하는 것도

내가 나를 키우는 것도

지쳐간다.

내가 나에게 이야기한다는 표현,

억지로 쓴다.

자꾸만 

'너' 라는 표현을 쓰게 된다.

힘내자, 가 아니라

힘내라, 하나야. 

내 잘못이 아니야, 가 아니라

네 잘못이 아니야.

분열되는 기분.



단 한 명이라도 의지할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태산 같이 나를 지탱해줄,

힘들면 쓰러질 걱정 없이 기댈 수 있는 존재.



-



스스로를 돌보는 일에 지쳐간다.

도대체 이 놈의 마음은 얼마나 더 고쳐주어야

얼마나 더 쓰다듬어야

얼마나 더 치료해야

피가 멈출는지.



-








티아레  12.01.22 이글의 답글달기

1월 16, 17일자 “친딸을 18년간 상습 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되어 징역 8년을 선고받은 현직교사”에 대한 기사에서 봤는데 “학대순응증후군”이라는 게 있다는군요. 어려서부터 시작된 학대가 오랜 시간 지속되면 피해자가 자신이 받는 학대를 받아들이게 되고 순순히 응할 수 밖에 없는‘심리적 항거 불능상태’가 되는 걸 의미하는 것 같아요.

아버지랑 설에 같이 시골에 가는 게 싫으면, 싫다고 얘기를 해요.
아버지를 만나고 싶지 않으면, 만나고 싶지 않다고 자신의 의사를 분명히 밝혀요.
그래도 돼요. 아니 당연히 그래야해요.

지금까지는 상대가 원하고 요구하는 대로 응해줬지만 이제 하나양은 성인이에요.
하나양이 그렇게 계속 자신을 죽이고 상대의 요구에 응해주는 한,
상대는 파렴치하고 이기적인 요구를 끝도 없이 계속 할 거예요.
거절하고 항거하는 법을 배우고 실행할 때가 되었어요.
그렇게 하지 않는 건 스스로에 대한 멸시나 다름 없어요.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권리를 양보하지 말아요.
그건 착한 것도 아니고, 하나양 뿐만 아니라 가족들에게도 결코 좋은 일이 아니에요.
하나양이 스스로를 존중하기 전에는 가족 누구에게도 존중받지 못할 거예요.

하나양의 문제를 동생과 얘기해 본 적이 있는지 모르겠는데,
동생도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겠지요.
그렇든 그렇지 않든, 하나양이 아버지와 대면하지 않고 지내는 것에 대해
가족 누구에게도 부담을 갖을 필요 없어요.

검사가 기소한다고 해도 징역 8년 이상은 선고받아야할 중죄를 지은 사람이에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렇게 하자는 대로 응해주면서 상대에게 끌려다니는 게 훨씬 부자연스러운 상황이지요.
동생이 그런 모습을 보면서 무엇을 느끼고 배울까요.
아버지는 분명 하나양에게 큰 죄를 저질렀고, 한낱 미물도 밟히면 꿈틀하는 건데, 누나가 항거는 커녕 꿈틀 조차도 하지 않는다면,
아버지가 한 일이 잘못된 일인지 아닌지조차 분간이 안될 거고, 가치관 형성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지 않겠어요.

사실 하나양이 아버지에 대해 단호한 태도를 취하면 취할수록 동생에게는 좋은 본보기를 보이는 것일 수도 있어요.
동생이 아버지의 유전자를 어느 정도는 받은 남자라는 걸 간과할 수는 없다는 거죠. 동생이 아버지와 떨어져서 엄마와 누나랑 살게 된 것도 다행한 일이지 절대로 불쌍한 일은 아니에요.

왜 잘못은 부모가 저지르고 모든 댓가는 하나양이 짊어지려하나요.
댓가의 일부라도 좀 치루게 두세요.
그래야 조금이라도 깨닫고 뉘우치는 바가 생기지 않겠어요.
딸이 당분간이든 더 오랜 기간이든 대면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라도 해야
하나양이 상처를 받았다는 것도 알게 되고, 그동안 자신이 저지른 일을 되돌아보기라도 하지 않겠냐는 거죠.
그건 아버지에게도 좋은 일이에요. 그에게서 그 기회마저 빼앗지 말아요.

하나양이 얼마나 상처받았는지, 지금도 얼마나 아프고 고통스러운지
소리를 못지르겠으면 신음소리라도 내요.
그러기 전엔 결코 알아주지 않을 거고, 하나양이 아프다는 사실 조차도 아무도 모를 거예요. “이 애는 그렇게 해도 되는 애”가 되는 거라구요.

선택은 양극단의 선택만 존재하는 게 아니에요.
양극단만 생각하니 엄두가 안나고 어려울 밖에요.

"이렇게 말해 버리고
다시는 만나지 않든지
아니면 한 대 맞든지
아니면, 정말 어쩌면 사과를 받든지."

=> 이게 다 아닐 수가 있다는 거죠.
"당분간은" 만나지 않겠다고 선언하면 되요.
그래도 부모인데 영영 안보고 살기는 어려울 거고,
거기에 대해 폭력을 휘두른다면 그건 더이상 참지 않고 항거하기로 결심을 하세요.
그리고 아버지도 그렇게는 못할 거예요. 인간이라면.
당장 사과를 받고 안받고 보다 더 중요한 건, 본인 스스로 깨닫고 뉘우칠 시간과 기회를 주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 시작은 하나양의 관계단절 선언일 거구요.

"좋은 감정들까지 버리고 싶지는 않지만
어느 한 쪽만 가질 수는 없는 거라면,
차라리 좋은 감정이든 나쁜 감정이든
아예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다.
사랑 같은 거 이제는 안 해도 좋으니까
다시 닫아버릴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것 역시 너무 극단적이고 감정적인 접근.
좋은 감정, 나쁜 감정, 사랑의 감정, 증오의 감정 다 느끼며 사는 게 인간이고, 한쪽이 싫다고 감정을 아예 다 느끼지 않거나 마음을 다 닫고 살 수는 없잖아요.
원한다고 그렇게 되는 것도 아니고.
다만 좋은 쪽을 더 보려고 노력하는 거고, 하나양 같은 (극단적인) 평화주의자들은 다른 사람들 감정까지 다 느끼고, 공감하고 배려하느라 상처를 더 많이 받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들에겐 또 그걸 견딜 수 있는 힘도 함께 주어지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해요.
나도 항상 그 반대의 사람들을 "the fittest(적자)" -적자생존의 법칙(Survival of The Fittest)-라고 일컫는답니다ㅎ




티아레  12.01.22 이글의 답글달기

지난번에 "권리의식" 얘기했지요.
하나양에게 몹시 결핍된 것 중에 하나에요.
연민은 극도로 과잉된 상태.
결핍된건 채우고 지나치게 많은 건 덜어내는 연습을 좀 해야겠어요.
지금같은 경우는 자연스럽지도 않고, 건강한 상태도 아니니까요.
자식에게 당연히 해줘야할 의무에 대해 하도 징징대고 생색내는 부모를 만난 영향도 큰 것 같아요. 누가 부모고 누가 자식인지를 모르겠어요.

그리고 자신의 영역이나 권리에 대한 선긋기 훈련이 필요해 보여요.
가족이나 타인과의 관계에서 서로를 위한 어느 정도의 배려나 희생은 좋은 것이지만, 어느 선을 넘어서서 상대가 계속 무례하고 뻔뻔하게 굴면 더이상 침범하지 못하도록 상대에게 경고하는 마지노선과 같은 선을 그어줄 필요가 있어요.
내가 받아줄 수 있는 한계는 거기까지라고 단호하게 선을 그어주는 거죠.

중요한 건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는 관계가 건강하고 좋은 관계라는 거죠.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다 내주고 다 받아주는 관계는 잘못된 관계고 제대로 지속될 수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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