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 티아레   2012-04-16 07:52 (월) 

융의 어록 3


인격의 형성

1. 어린이의 인격교육

인격을 키우는 교육이라는 드높은 이상은 아이들에게는 적용하지 말아야 한다. ‘개성적 주체’가 의미하는 것, 즉 확고하고 저항력 있고 힘있는 심적 전체성은 성인의 이상이다. 개인이 그의 이른바 어른됨이라는 문제들이 무엇인지 아직 의식하지 못하거나 - 더욱 나쁜 것으로 - 그것을 고의로 이리저리 피해 가는 시대에만 그 이상을 아동기 문제로 생각해버리고 싶어 한다. 나는 아동에 대한 우리의 현대 교육학적, 심리학적 열광에 정직하지 않은 의도가 있지 않나 의심한다. 즉, 아이 이야기를 하지만 실은 어른 속에 있는 아이를 생각한다고 의심하는 것이다. 어른 속에 아이가 들어 있는 것이다. 이 영원한 아이는 여전히 형성 중이며, 결코 완성이 없고, 끊임없는 보살핌과 주목과 교육이 필요하다.

2. 우리 자신속의 아이들

우리가 아이들에게서 바꾸려 하는 모든 것을 우리는 우리에게 고쳐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주의 깊게 검토해야 한다. 예를 들면 우리의 교육열이 그렇다. 아마 교육은 우리 자신에게 필요할지 모른다. 아마 그 교육의 필요성을 인정하면 우리 스스로가 여전히 아이들이고 상당한 정도로 교육이 필요함을 상기하게 되기 때문에 인정을 안 하는지도 모른다.

3. 우리 스스로 전체가 되려는 노력들을

본인 스스로 인격이 없으면서 남을 인격으로 교육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아이가 아니라 어른만이 이 목표에 맞추어 열심히 산 결실로서 인격이 될 수 있다. 인격에 도달하려면 한 특별한 개체 전체가 가능한 잘 발달해야 하기 때문이다.

4. 인격은 道이다

우리 안에 있으면서 아직 발견되지 않은 길은 심적心的으로 살아 있는 것, 고대 중국 철학이 ‘도道’라고 부르며 목표를 향해 계속 흘러가는 물에 비유한 그것과 같다. 도道 안에 있음은 완성, 전체성, 채워진 소명, 사물에 고유한 존재 의미의 시작이자 목표이자 완전한 실현이다. 인격은 도道이다.

융 기본저작집 9권 중 인격의 형성에서


무한한 것의 느낌과 자기

인류에게 던져진 결정적인 물음이란 그대는 무한한 것에 연계되어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것이 그의 인생의 시금석이다. 무한한 것이 본질적인 것임을 내가 알때라야만 나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이 아닌 쓸데없는 일에 관심을 두는 일이 없을 것이다. 내가 그것을 모를 때 나는 개인적으로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의 이런 저런 성격들 때문에 무엇인가를 이 세상이 인정하도록 고집할 것이다. 그러니까 그렇게 고집하게 되는 것은 아마도 “나의” 재능이나 “나의” 멋 때문일지 모른다. 인간이 그릇된 소유를 고집하면 할수록 그리고 본질적인 것을 느낄 수 없으면 없을 수록 그의 삶은 더욱 불만족스러운 것이 된다. 그는 제약된 것처럼 느낀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제약된 의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선망과 질투를 만든다. 우리가 이미 이승의 삶에서 무한한 것에 결속되어 있다는 것을 느끼고 이해할 때 우리의 욕구와 자세가 바뀌게 된다. 결국 인간에게 합당한 것은 오직 본질적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갖지 않았다면 인생은 낭비된 것이다. 또한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무한한 것이 그 속에 표현되는지 안 되는지가 결정적인 것이다.

무한한 것의 느낌은 다만 내가 극단적으로 유한할 때 도달할 수 있다. 인간의 가장 최대의 제약은 “자기”自己Selbst*이다. 그것은 “나는 다만 그것일 뿐 이다”라는 체험 속에 나타난다. 내가 자기 안에서 가장 제약되어 있다는 의식만이 무의식의 무한성에 연결될 수 있다. 이러한 깨달음에서 나는 나를 유한하면서도 영원하며, 이것이면서도 다른 것으로서 경험한다. 내가 나를 고유한 일회적一回的 존재로서 나의 개인적인 결합 속에서 궁극적으로 제약되어 있음을 알게 되면서 나는 또한 무한함을 의식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다. 그러나 다만 그럴 때만 이것이 가능하다.

야훼(이부영역) : ‘C.G. 융의 회상, 꿈 그리고 사상’ 집문당 368-369쪽에서



우울하고 자살을 생각한 사람에게 보낸 C.G.융의 편지

편지 1. (1946년 7월 10일) 이름을 밝히지 않은 한 독일인에게

(전략)

지금 당신이 하고 있는 일에 얼마간의 기쁨과 만족을 느낀다면 그것을 가꾸어 가십시오.
그것들이 아니더라도 무엇이든 인생에서 당신에게 조금이라도 기쁨을 주는 것이라면 그것을 하십시오. 자살의 관념은 인간적으로 아무리 이해할 수 있는 것이라 하더라도 내게는 권할 만한 것이 아닌 듯합니다. 우리는 최대한 정신적 발전과 의식화에 도달하기 위해서 살고 있습니다. 삶이 조금이라도 유지되는 한, 우리는 삶을 의식화의 목적을 위해서 사용하도록 굳게 다짐해야 합니다. 조기에 삶을 중단한다는 것은 우리가 만들었다기 보다 그 실험 계획 속에 이미 들어가 있는 실험을 중지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그 실험을 끝까지 수행해야 합니다. 당신에게 모든 것이 너무나 어렵다는 것은 혈압이 80이라는 사실로도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나는 당신이 그런 삶을 끝까지 끌고 간다고 하더라도 결코 후회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확신합니다. 당신이 하는 일 말고도 매일 성경책을 읽듯시 좋은 책을 읽는다면 아마 지금은 아직 실감하지 못하겠지만, 당신에게 재산을 건네 줄수 있는 마음의 내면으로 다리를 놓아줄 수 있을 것입니다. .....


편지 2. (1946년 7월 25일) Dr. Eleanor Bertine(Bailey Island USA)에게

(Kristine Mann - 뉴욕 융 심리학파 창설자중 한 사람의 병과 죽음과 관련.)

그렇게 끔찍한 병에 걸린 사람이라면 자기 인생에 종지부를 찍어야하는지 그래도 좋은지는 정말 의문입니다. 이런 경우에 나에게 가장 알맞는 태도는 아무것도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 나는 일을 되어가는 대로 두어둘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 속에 자살이 계획되어 있다면 실제로 그의 전 생애는 이 방향으로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나의 확신입니다. 나는 자살을 못하게 막는 것이 거의 범죄적이라고 해야 할 사례들을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살은 그들의 무의식의 경향에 일치되었으며 따라서 그것이 이들이 지닌 하나의 근본 소여라는 증거가 제시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생각으로는 그런 종말을 막았다고 해서 실제로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개인의 자유로운 결단에 맡겨야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잘못이라고 여겨지는 모든 것은 우리가 마음대로 다룰 수 없고 또한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어떤 종류의 사정아래에서는 옳은 것일 수 있습니다.

Kristine Mann이 참을 수 없는 동통의 압박 때문에 자살을 했다면 나는 그것이 옳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녀가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그녀의 별들에는 그녀가 그렇게 잔인한 괴로움을 겪어야 하도록 되어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를 우리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삶은 우리만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대부분 그것은 우리들에게는 감추어진 원천에서 생겨났습니다. 심지어 콤플렉스들도 출생 전 백년 또는 그 이상 오랜 시간부터 시작했습니다. 말하자면 카르마와 같은 것이 존재한다는 것이지요.
........


참고문헌 :
C.G.Jung, Briefe (hrg. A. Jaffe, G. Adler)II,1972,Walter-Verlag, Olten und Freiburg.


편지 3. (1951년 10월 13일) 이름을 밝히지 않은 미국여인에게

(47세의 여인이 심한 우울증 상태에서 융에게 그녀가 21세에 행한 자살기도가 그녀의 “자기”의 부분을 죽인 것은 아닌지 물은 편지.)

N 부인

당신의 물음은 복잡하여 쉽게 대답할 수 가 없군요. 많은 것이 당신의 이해 여부에 달렸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성격의 발전과 성숙 또한 당신의 이해에 달렸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자기”의 일부를 죽일 수 없습니다. 당신이 당신의 의식된 인격, 즉 자아-인격을 파괴하면
자기의 진정한 목표, 즉 자기실현을 박탈하게 됩니다. 인생의 목표는 자기의 실현입니다. 자살로 당신은 당신의 인생을 최종목표에 이르기까지 인도하는 자기의 의지를 말살하게 됩니다. 그러나 자살시도는 자기의 실현 성향을 침해하지 않습니다. 물론 만약 그 사건의 성질을 의식하지 못한 채 있다면 당신의 개인적인 발전은 멈추어 버린 상태에 있게 됩니다. 당신은 자살이 살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자살 뒤에는 통상적인 살인과 똑 같이 시체만 남게 되기 때문입니다. 다만 살해된 사람이 당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관습법은 자살시도에 벌을 줍니다. 그리고 심리학적으로 이것은 옳은 일입니다. 이런 까닭에 자살은 올바른 해답이 아닙니다.

이러한 위험한 충동의 성질을 당신이 인식하지 못하는 동안에는 계속 발전해나갈 길이 막히게 됩니다. 그것은 마치 도둑질을 준비하면서 자기의 의도를 의식하고 있지도 않고 그런 도둑질의 윤리적 함의를 인식하지도 못하고 있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도 만약 그가 그의 범죄적 경향을 의식하게 될 때 오직 그때에 앞으로 발전해갈 수 있습니다. 범죄성향은 아주 흔합니다. 다만 사람들이 그것을 항상 실행하지 않을 뿐입니다. 그리고 어두운 그림자가 그의 뒤를 따르고 있다는 사실을 이런 저런 식으로 인식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숙명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어느 날 완전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또한 상당히 끔찍한 생각입니다만 ! 우리는 우리 자신을 너무 단순하게 보아서는 안되겠습니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하여 우리는 낮은 데로 내려가 보다 겸허하게 자기를 평가해야 하겠습니다.

원컨대 내가 당신의 물음에 대답하였기를.

Praxis der Psychotherapie, G.W. - Die Probleme der modernen Psychotherapie p. 61-62

<편집자 주>

융의 편지 2 : Kristine Mann 여사가 끔직한 병으로 고통속에 죽었다는 소식에 접하여 쓴 편지에서 융은 자살에 대하여 좀 더 신중한 태도를 표명하였다. “우리에게 잘못이라고 여겨지는 모든 것은 우리가 마음대로 다룰 수 없고 또한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어떤 종류의 사정아래서는 옳은 것일 수 있습니다.” 라는 말을 잘 음미하면 우울증환자에게 보낸 다른 두 편지와 결코 모순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이 시대의 혼魂’은 효용성, 의미, 그리고 가치에 관해 듣고 싶어 할 것이며, 나 또한 그 방향에서 생각해 왔다. 그러나 이제 어쩔 수 없이 ‘심층의 혼’ - 다른 혼 - 이 나에게 발언할 것을 강요한다. 나는 그 말에 어떤 정당성도 부여할 수 없지만 그래도 그의 말을 해야 한다. ‘ 심층의 혼’은 아득한 옛날부터 먼 미래에 이르기까지 ‘이 시대의 혼’보다 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 ‘ 심층의 혼 ’은 판단의 힘을 두둔하는 나의 오만과 긍지를 제압하였고 나의 학문에 대한 믿음을 제거해 버렸다. 사물을 질서있게 정리하고 설명하는 기쁨을 나로부터 빼앗아갔다. 그는 이 시대의 이상에 대한 나의 헌신을 없애버렸다. 그는 최후의, 가장 단순한 것으로 내려가기를 나에게 강요했다.

심층의 혼은 모든 나의 오성과 지식을 빼앗고 그 대신에 이해할 수 없는 모순에 이바지하도록 하였다. 즉, 의미Sinn와 무의미Unsinn가 하나로 녹아들어 그로 말미암아 생겨난 초의미 超意味 Übersinn에 봉사하지 않는 모든 언어들과 글자들을 박탈하였다.

『붉은 책』, 첫 책, <앞으로 다가올 자의 길>


가련하도다 ! 본보기에 따라 사는 자들이어. 삶은 그들과 함께 있지 않다. 그대들이 그대들의 본보기에 따라 산다면 그대들은 본보기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내 자신이 살지 않는다면 누가 그대들의 삶을 살 것인가 ? 그러니 그대들 자신을 살라.

『붉은 책』, <앞으로 다가올 자의 길>, 융의 <논평> 중에서


나는 심혼(Seele)을 이성으로 판단했다. 그것을 학문의 대상으로 삼았다. 심혼이 나의 판단과 지식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몰랐다. 오히려 나의 판단과 지식이 심혼의 대상이다. 그래서 심층의 혼은 나에게 심혼이 살아있는 것으로 스르로 생긴 앎이라고 부르도록 요구한다.

이 시대의 혼’은 이 생각에 반대한다. 그는 심혼이 인간에 종속하는 것, 판단하고 분류할 수 있는 것, 그 크기를 헤아릴 수 있는 것이라 본다. 그러나 내가 과거에 생각한 나의 심혼Seele은 나의 심혼이 아니라 죽은 학설 이었다.

『붉은 책』, <심혼의 재발견>에서


나는 나의 생각의 부스러기와 나의 꿈이 나의 심혼의 언어임을 배웠다. 꿈은 나를 인도하는 심혼의 말이다.

『붉은 책』<심혼과 신>에서


모든 미래는 상(像Bild, Image)속에 이미 들어 있다. 그들의 심혼Seele을 찾기 위해 옛사람은 황야로 갔다. 이것은 하나의 상이다. 옛사람은 그들의 상징을 살았다. 그에게 세계는 아직 현실화 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황야의 고독 속으로 갔다. 고독한 황야임을 가르쳐 주기 위하여 그곳에서 그들은 환영幻影, 즉 황야의 과실, 심혼의 희귀하고 경이로운 꽃들을 발견했다.

『붉은 책』<황야>에서


정신치료의 주목적은 환자를 상상할 수 없는 행복으로 이끌어 가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고통을 참는 철학적 인내와 꿋꿋함을 갖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삶의 전체성과 충만을 위하여 기쁨과 고뇌의 균형이 요청된다.

<정신치료와 세계관> 기본저작집 제 1권 65쪽


인간이 산소, 물, 단백질, 지방 등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듯이 사회없이 존재할 수 없다. 산소나 물처럼 사회는 인간의 가장 필수적인 존재 조건의 하나이다. 그런데 인간이 공기를 숨쉬기 위해 산다고 주장한다면 말이 안 된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사회를 위해 존재한다는 것 역시 말이 되지 않는다. ‘사회’는 인간 집단의 공생共生을 위한 단순한 개념이다. 하나의 개념이 삶을 짊어지고 가는자(운반자)는 아니다. 자연스러운 유일한 삶의 운반자는 개인이며 모든 자연계에서도 그러하다. ‘사회’ 또는 ‘국가’는 삶의 운전자들의집합이며, 동시에 그것의 기구로서 중요한 삶의 조건 중 하나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사회의 하나의 입자粒子로서만 존재할 수 있다고 한다면 이것 역시 옳은 말은 아니다. 어떤 경우이든 인간은 국가없이도 공기없이 사는 것 보다 훨씬 오래 산다.

<정신치료의 현재> 기본저작집 제 1권 84쪽


치료자는 이제 행동하는 주체가 아니고 개인의 발달과정에서 함께 체험하는 자 Miterlebender인 것이다.

<실제정신치료의 기본원칙> 기본저작집 제 1권, 19쪽


분석가가 반드시 분석을 받아야 된다는 요구는 변증법적 방식이라는 생각에서 그 절정을 이루는데, 거기에서 치료자는 묻는 자일 뿐 아니라 대답하는 자로서 다른 정신 체계와의 관계 속으로 들어간다. 그는 이미 우월한 자도 많이 아는 자도 아니고, 재판관이나 충고를 주는 사람도 아니며 함께 체험하는 자로서, 환자라고 부르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변증법적 과정 속에 속해 있는 것이다.

<실제정신치료의 기본원칙>) 기본저작집 제 1권 20쪽


나는 인생이 자신의 뿌리를 통해서 살아가는 식물과 같다고 생각해 왔다. 식물고유의 삶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뿌리에 숨어 있다. 땅 위에서 보이는 것은 오직 여름 동안만 지탱한다. 그리고는 말라버린다. 하루살이 같은 현상이다. 우리가 우리의 삶과 문화의 끝없는 생성과 소멸을 생각하면 전적으로 공허한 인상을 얻게 된다. 그러나 나는 영원한 변환 속에서도 살아서 지속되는 어떤 것이 있다는 느낌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다. 우리가 보는 것은 꽃이다. 꽃은 사라진다. 그러나 뿌리는 계속된다.*

아, 이 얌전한, 유능하고 건장한 사람들, 이들은 마치 빗물받이에 잔뜩 몰려서 즐겁게 꼬리치며 햇볕 아래 누워 있는 천진난만한 올챙이들처럼 보인다. 어느 물보다도 얕은 곳에 있으면서 내일이면 빗물받이가 말라 버릴 것을 짐작 조차 못하고 있다.*

마음이란 신체보다도 훨신 복잡하고 접근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것은 이를테면 우리가 그것을 의식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존재하는 세계의 반쪽이다. 그러므로 마음이란 개인적인 것일 뿐 아니라 세계의 문제이며 정신과의사는 전체 세계와 관계를 가지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를 위협하는 위험이 예전과는 달리 자연으로부터가 아니라 인간으로부터, 개인 개인의,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마음으로부터 나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위험한 것은 바로 인간의 정신적 변질이다! 모든 것은 우리의 정신이 올바로 기능을 발휘하고 있는지 아닌지에 달려 있다. 만약 오늘날 몇몇 사람들이 정신을 잃는다면 수소폭탄이 폭발할 것이다! 그런데 정신치료자는 환자만을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만큼 중요한 것은 그가 그 자신을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련의 필수조건은 자기 자신의 분석, 즉 이른바 교육분석이다. 말하자면 환자의 치료는 의사에게서 시작된다.*

모든 치료자는 제 3자로부터 지도를 받아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다른 관점을 갖게 된다. 교황조차도 고해신부를 가지고 있다. 나는 분석가에게 늘 권고한다. “고해신부들을 가지든지 고해어머니를 갖도록 하시오!”라고. 여성들은 그런 일에 아주 유능하다. 그녀들은 흔히 탁월한 직관과 적절한 비판력을 지니고 있고, 남자들이나, 경우에 따라서는 그 남자들의 아니마-모략의 속셈을 알아차릴 수 있다. 그들은 남자가 보지 못하는 측면을 본다. 그러므로 그녀의 남편이 초인이라고 확신하는 부인은 한 사람도 없는 것이다! *

정신치료적인 효과를 얻는 데 의사와 환자 사이의 공감있는 의사소통은 필수적인 것이다. 이를 통하여 앓는 사람들이 지닌 마음의 깊이와 높이에서 의사가 얻는 커다란 감명을 그는 외면할 수가 없다. 의사소통이란 끊임없는 비교와 동화, 서로 대면하고 있는 정신적 사실의 변증법적 대결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이러한 상호간의 인상들이 어느 한쪽에서 어떤 이유에서든 효과가 없으면 정신치료과정도 효과가 없고 아무런 인격의 변화도 일어나지 않게 된다. 의사든 환자든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에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아무런 해결책도 발견 될 수 없다.*

오늘날의 이른바 노이로제 환자 가운데는 예전 같으면 노이로제가 안 되었을 사람, 즉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분열이 일어나지 않았을 사람들도 적지 않다. 인간이 아직 신화를 통해서 조상의 세계와 연결되어, 그로써 단지 밖에서 본 자연이 아닌 체험된 자연과 결합되어 있던 그런 시대, 그런 환경에서 그들이 살았더라면 자신과의 불일치는 일어나지 않은 채 있었을 것이다. 이들은 신화의 상실을 참지 못하고 그저 외적이기만한 세계, 즉 자연과학의 세계상으로 향한 길을 찾을 수도 없고 지혜와는 털끝만큼도 관계없는 언어의 지적인 환상적 유희에 만족할 수도 없는 인간인 것이다.*

* 야훼 역음(이부영 역) C.G. 융의 회상, 꿈 그리고 사상, 집문당 에서


원형이 지닌 누미노제의 작용을 스스로의 체험으로 알지 못하는 자는 그가 실지 임상에서 그것과 대면하였을 때 원형이 지닌 부정적 영향을 거의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원형은 과대평가되거나 과소평가될 것이다. 왜냐하면 경험적인 척도를 지니지 못하고 다만 지적인 개념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개념에 대하여는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 바로 이것이 사람들이 바라던, 체험하지 않아도 되게끔 보호해 주는 안일함이다. 심혼은 개념 속에 살아 있는 것이 아니고 행위와 사실 속에 살아 있다. 사람들은 단어의 나열만으로 개를 난로가에서 나오도록 유도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 과정을 끝없이 반복하고 있다.

현대 정신치료에서 의사나 정신치료자는 환자와 그들의 감정과 글자 그대로 “함께 가야” 한다고들 요구하고 있다. 나는 이것이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니라고 본다. 의사 쪽에서 적극적으로 간여할 필요가 있는 경우도 흔하다.*

* 야훼 역음(이부영 역) C.G. 융의 회상, 꿈 그리고 사상, 집문당 에서

193. 티아레   2012-04-16 06:56 (월) 

융의 어록 2


열정적인 욕구는 두 측면을 지닌다. 즉, 그것은 모든 것을 미화하며, 그러면서도 상황에 따라서는 모든 것을 파괴하기도 하는 힘이다. 그러므로 어떠한 격렬한 욕구가 그 자체로 이미 불안을 동반하든지, 아니면 그 뒤에 불안이 뒤따르는, 혹은 불안을 예감하게 된다는 것은 납득할만하다. 열정은 운명을 초래하고 그로써 되돌릴 수 없는 어떠한 것을 만들어낸다. 그것은 시간의 바퀴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면서, 또한 추억에 돌이킬 수 없는 과거의 짐을 지운다. 운명에 대한 불안이야말로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것은 예견할 수 없고 무한정하다. 그것은 알 수 없는 위험을 품고 있다. 그러므로 삶의 모험에 대한 신경증환자의 주저함이 위험한 싸움에 얽혀 들지 않기 위해 옆으로 비켜서 있으려는 소망에서 나온 것임은 어렵지 않게 설명될 수 있다. 몸소 체험하려는 모험을 포기하는 사람은 자기 안에 있는 그러한 모험에의 욕망을 질식시킴으로써 일종의 부분적 자살을 자행하는 셈이 된다. 욕망의 체념에 즐겨 뒤따르는 죽음의 환상은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C.G. 융 기본저작집 7권『상징과 리비도』 ‘나방의 노래’중에서


열정은 인간으로 하여금 그 자신을 넘어서게 할 뿐 아니라 또한 그의 유한성과 현세성을 넘어서게 한다. 그리고 인간을 높이는 가운데 말살한다. ― 이러한 󰡒높임󰡓은 예컨대, 인간들에게 혼란을 가져오는 드높은 바벨탑 건축에서, 혹은 루시퍼의 높임에서 신화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바이런의 시에서 그것은, 별들을 복종시키고 신의 아들들까지 유혹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카인 종족의 공명심이다. 지고至高의 것에 대한 갈망이 이미 정당한 것이라 해도, 그것이 인간에게 정해진 경계를 벗어난다는 상황이 벌써 불경스러운 월권이며 그로써 또한 타락이 된다. 별에 대한 나방의 동경은 별이 하늘 높이 떠 있다고 해서 순수하진 않다. 그것은 결코, 그렇게 고상한 희망에 이를 만큼 자신을 벗어나지 못하는 한 마리 나방의 욕망이다. 인간도 결국 인간으로 머문다. 그의 과도한 욕망으로 인해 인간은 신적인 것까지도 그의 타락한 열정 속으로 끌어내릴 수도 있다. 그는 신적인 것을 지향하며 높여진 것 같지만, 그러나 그 때문에 자신의 인간성을 저버린다.

C.G. 융 기본저작집 7권『상징과 리비도』에서


또한 태양은 의인과 악인을 동시에 비추며 유용한 생물이나 해로운 생물을 마찬가지로 자라나게 한다. 따라서 태양은 이 세상의 가시적인 신으로 그려지기에 적절하다. 다시 말해 그것은 우리 자신의 심혼이 지닌 충동적인 힘이다. 우리는 그것을 리비도라 부르는데, 유용한 것과 해로운 것, 선과 악을 생겨나게 하는 것이 그것의 본질이다. 이러한 비유가 단순한 말장난이 아니라는 것은 신비주의자들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었다. 즉, 내면화를 통해 그들 고유한 존재의 심층까지 내려가게 되면, 그들은 󰡒자신의 마음속에서󰡓 태양의 이미지를 발견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기 고유의 󰡒삶의 의지󰡓를 발견한다. 그것을 태양이라고 부르는 것은 타당하다.

C.G. 융 기본저작집 7권『상징과 리비도』에서


# 도덕은 지능과 같이 하나의 선물인 듯 하다. 그것이 천부적으로 타고 나지 않은 체계에 억지로 도덕을 주입하면 손상을 입히지 않을 수 없게 된다.
(C.G. 융:「종교와 심리학」에서)

# 우리는 우리의 과거, 즉, 탐욕과 정동을 수반한 원시적이고 열등한 인간을 우리 자신과 함께 걸머지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이 부담에서 벗어나려면 상당한 노력을 기울여야만 한다. 만약 신경증에 걸리게 된다면 여기에는 언제나 현저히 강화된 그림자가 관계된다. 그런 사례가 치유 되려면 의식된 인격과 그림자가 함께 살 수 있는 길이 발견되지 않으면 안된다.
(C.G. 융:「종교와 심리학」에서)

# 그림자의 단순한 억제는 치료제가 될 수 없다. 두통에 대하여 머리를 잘라 버리는 처방을 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한 인간의 도덕성을 파괴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도움이 안된다. 왜냐하면 그로써 보다 나은 자기Selbst를 죽이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보다 나은 자기 없이는 그림자 또한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C.G. 융:「종교와 심리학」에서)


# 오늘날 의료정신치료자는 교육받은 그의 환자들에게 종교적인 체험의 기초를 다시 설명해 주고 심지어는 그러한 체험을 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해야 한다. 내가 의사이자 자연의 탐구자로서 복잡한 종교적인 상징들을 분석하고 그 상징들의 근원을 더듬어 갈때, 이 작업의 유일한 목표는 오로지 상징들이 나타내고 있는 가치를 요해了解함으로써 이를 보존하고 사람들에게 상징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다시금 되살리도록 하는데 있다.
(C.G. 융:「변환의 상징」에서)

# 하나의 진리가 긴 세월을 두고 효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오직 그것이 변환되고 다시 새로운 상들로서 증명되고, 새로운 말로, 새 부대에 채워진 새 포도주일 때이다.
(C.G. 융: 「변환의 상징」에서)


# 모든 심리학적 극단은 암암리에 그 대극을 내포하거나 그 대극과 가장 밀접하고도 본질적인 관계를 맺는다. 그렇다, 바로 이러한 대극성으로부터 그가 갖는 고유의 역동성이 나오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 대극으로 전도되지 않는 거룩한 관습은 없는 법이다. 어떤 하나의 입장이 극단적이면 극단적일 수록, 오히려 대극의 반전, 즉 에난치오드로미Enantiodromie가 더 예기될 수 있다. 최상의 것은 악마적으로 왜곡될 위험이 가장 크다. 왜냐 하면 최상의 것은 나쁜 것을 가장 많이 억압하였기 때문이다.
(C.G. 융:「변환의 상징」에서)


# 영웅은 인간 내부에 있는 신의 변환을 연기하는 배우이다. 그는 내가 ‘마나-인격’이라고 부른 것에 해당한다. 의식에게 이 인격은 엄청난 매력으로 다가 온다. 즉, 자아Ich는 영웅과 동일시하려는 유혹에 쉽게 빠져 버린다. 그로 인해 정신적 팽창이 온갖 이에 수반되는 결과와 함께 출현한다.
(C.G. 융:「변환의 상징」에서)


# 의사가 필요한 것은 심혼에 관한 과학Wissenschaft der Seele이지 심혼에 대한 이론이 아니다. 나는 과학의 작업을 정당성을 획득하기 위한 시합이 아니라, 인식을 증대시키고 심화시키는 작업이라고 본다.
(C.G. 융:「변환의 상징」에서)


감추어지거나 숨어 있는 것을 의식화意識化하는 일은 분명 우리로 하여금 해결될 수 없는 갈등과 대립하게 만든다. 최소한 의식에는 그렇게 보인다. 그러나 무의식으로 부터 꿈에 나타난 상징들은 대극과의 직면을 제시하며 그 목표의 상들Bilder은 대극간의 성공적인 합일을 나타낸다. 이로서 우리는 우리가 무의식적 본성의 측면으로부터 도움을 받는다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C.G. Jung :‘욥에의 회답’ 에서


그러나 자기 자신의 본성을 더 잘 알지 못한다면 인간은 더 앞으로 나갈 수 없다. 유감스럽게도 이러한 점에서 끔찍한 무지無知와, 자신의 본질에 대한 앎을 증대시키는 작업에 대한 결코 적지 않은 혐오가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

C.G. Jung :‘욥에의 회답’ 에서


그래도 전혀 예상밖의 사람들 사이에 오늘날 심리학적 관점에서 무엇인가 인간에게 일어나야만 한다는 통찰을 더 이상 숨기고 있을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C.G. Jung :‘욥에의 회답’ 에서


융의 어록 - 기본입장 ① 경험론자로서 :

사람들이 나를 자주 철학자라고 부르지만 나는 경험론자이며 경험론자로서 현상학적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나는 때때로 우리가 경험자료의 단순한 분류나 수집의 범위를 벗어난 고찰을 한다고 해서 그것이 과학적 경험론의 근본 원칙에 반하는 일은 결코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실 나는 반성적 고찰이 없는 경험이란 전혀 있을 수 없다고 믿고 있다. 왜냐하면 “경험”이란 하나의 동화 과정이며 그것 없이는 요해了解Verstehen도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내가 심리학적 사실들에 접근하는 입장이 철학적 입장이 아니라 자연과학적 입장임은 자명하다.

C.G. Jung :‘심리학과 종교’ 에서


융의 어록 - 기본입장 ② 현상학적 관점 :

나의 관점은 전적으로 현상학적인 관점이다. 즉, 이 관점에서 나는 일어난 일들, 사건들, 경험한 것들 - 간단히 말해서 사실들Tatsachen을 다룬다. 이 관점에서 본 진실은 사실이지 판단이 아니다. 예를 들어 심리학이 처녀가 아기를 낳는 주제에 관해 말할 때 심리학은 그런 관념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해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관념이 어떤 의미로든 진실이냐 거짓이냐의 문제에 골몰하지 않는다. 그 관념은 그것이 존재하는 한 심리학적으로 진실이다.

C.G. Jung :‘심리학과 종교’ 에서


융의 어록 - 정신 ①

만약 어떤 남자가 나를 그의 원수라고 상상하여 죽인다면, 나는 단순한 상상 때문에 죽은 것이다. 상상은 존재하며 물질적 상태와 꼭 같이 위험하고 해로우며 그와 마찬가지로 현실적일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심지어 정신적 장해는 전염병이나 지진 보다도 훨신 더 위험하다고 믿는다. 중세의 페스트나 천연두 유행도 1914년의 의견 차이나 러시아의 정치적 “이상”만큼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이지는 않았다.

C.G. Jung :‘심리학과 종교’ 에서


융의 어록 - 정신 ②

우리의 정신Geist은 외부에 아르키메데스의 점이 없기 때문에 자기 자신의 존재형식을 파악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그것은 존재한다. 정신Psyche은 존재하며 심지어 존재 그 자체이기도 하다

C.G. Jung :‘심리학과 종교’ 에서


융의 어록 - 자기 Selbst

그런데 자기성찰은 주로 무의식적인 상태에 있는 사람이 가장 힘들어하고 싫어하는 것이다. 사람의 성질 자체가 의식화에 대한 현저한 두려움을 갖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의식화를 하도록 하는 것은 바로 자기Selbst이다. 자기는 어느 의미에서 우리에게 자신을 희생하면서 우리의 희생을 요구한다.

한편으로 의식화는, 조각난 부분들을 다시 모으는 행위로서 자아의 의식된 의지행위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일찍부터 존재했던 자기自己의 자발적인 출현을 의미한다.

개성화란 한편으로는 예전에 분산되었던 부분들이 합쳐서 이룩하는 새로운 통일체의 합성으로 나타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아에 앞서 이미 존재했고 자아의 아버지요 창조자요 전체인 본체가 모습을 드러내는 형태로 나타난다.

말하자면 무의식적인 내용을 의식화함으로써 우리는 자기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런 면에서 ‘자기’는 우리들의 아들이다. 이에 걸맞게 연금술사들은 그들의 불멸의 실체를 “철학자의 아들”filius philosophorum이라고 명명했는데 이것은 바로 우리가 말하는 자기Selbst를 의미한다.

그러나 우리가 개성화에 노력을 기울이게 되는 것은 그로부터 무의식성을 극복하고자 하는 가장 강력한 결정이 나오는 자기Selbst가 무의식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계에서 ‘자기’는 아버지이다.

C.G. Jung :‘미사의 상징’ 에서

192. 티아레   2012-04-16 06:51 (월) 

융의 어록 1

나의 생애는 무의식이 그 자신을 실현한 역사이다. 무의식에 있는 모든 것은 사건이 되고 밖의 현상으로 나타나며, 인격 또한 그 무의식적인 여러 조건에 근거하여 발전하며 스스로를 전체로서 체험하게 된다. 이러한 형성의 과정을 묘사함에 있어 나는 과학적인 언어를 사용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나는 나 자신을 과학의 문제로서 경험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內的인 견지에서 본 우리들의 존재, 인간이 그 영원히 본질적인 성질에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 그것은 오직 신화로써 묘사될 수 있다. 신화는 보다 개성적이며, 과학보다도 더욱 정확하게 삶을 묘사한다. 과학은 평균개념을 가지고 작업을 하는데, 이것은 너무 일반적이어서 한 개인의 특유한 인생이 지니고 있는 주관적인 다양성을 올바르게 파악하기 어렵다.

(아니엘라 야훼(엮음)(이부영역): C.G. Jung의 回想, 꿈, 그리고 思想, 제1장 프롤로그, 집문당, p17에서)


◇지혜와 바보스러움은 요정과 같은 존재 속에서 하나이며 동일한 것으로 나타날 뿐 아니라, 그것이 아니마를 통해서 표현되는 한 하나이며 같은 것이다. 인생은 바보스럽고 동시에 의미깊다.

◇혼돈 속에 우주가 있고 모든 무질서 속에 은밀한 질서가, 모든 작위 속에 항상 법칙이 있다. 모든 살아서 작용하는 것은 대극(對極)에 토대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C.G.Jung(1954) Von den Wurzeln des Bewußtseins, Zürich, Rascher Verlag p83에서


‘기예技藝는 전체인간을 필요로 한다’. (Ars totum requirit hominem !) 고대의 어느 연금술사는 이렇게 외쳤다.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전체 인간 homo totus이다. 의사의 노력과 환자의 추구가 목표하는 바는 저 감추어진, 아직 드러나지 않은, 보다 큰 미래적 존재인 전체적 인간이다. 그러나 전체성을 향한 올바른 길은 - 유감스럽게도 - 운명적인 우회로와 오류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것은 하나의 가장 긴 길(longissima via)로서 곧은 길이 아니라 대극을 이어주는 구불구불한 길이다. 그것은 미로처럼 너무 혼란스럽게 얽혀 있어 경악하지 않을 수 없는 오솔길로서, 길을 안내해주는 카두케우스caduceus(使者의 깃대, 미큐리 신의지팡이 - 역주)를 생각나게 한다. 흔히 ‘다가가기 힘든’것으로 이야기되곤 하는 체험이 그 길을 통해서야 이루어지는 것이다. 다가가기 힘든 이유는 그것이 많은 대가를 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대개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 다시 말해 우리가 늘 입에 담고서 끊임없이 이론적 논의를 하고는 있지만 삶의 현실 속에서는 멀리 피해가는 전체성wholeness을 요구한다.

(C.G. 융 : 연금술의 종교심리학적 문제 서론 C.G. 융(한국 융 연구원 역) 기본저작집 5권(근간)에서)


역설성paradox은 기묘하게도 최고의 정신적 선善에 속한다. 그러나 명확성clarity은 취약함의 징후이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가 지닌 역설성이 상실되거나 감소될 경우 종교는 내적으로 빈곤해진다. 반면 역설성이 풍부해질 때 종교는 풍요로워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역설을 통해서만 우리는 삶의 충만함을 대략적으로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아무런 모순이 없이 명확한 것은 편협할 뿐이기 때문에 불가해한 것을 표현하기에 적합하지 않다.

(C.G. 융:연금술의 종교심리학적 문제 서론 C.G. 융(한국 융 연구원 역) 기본저작집 5권(근간)에서)


어느 정도 철저한 치료에서는 언제나 인격의 어두운 반려자인《그림자》와의 대결이 저절로 일어난다. 이 문제는 교회에서의 죄의 문제만큼이나 중요하다. 해결되지 않는 갈등은 피할 수 없으며 고통스럽다. 나는《그래서 그것을 어떻게 하시려는 것입니까?》하는 질문을 이미 자주 받았다.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일종의 신(神)에 대한 신뢰 속에서 기다리는 것 말고는 전혀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인내와 용기 속에 참아낸 갈등으로부터 바로 그 사람에게 허락된, 예측하지 못한 해결책이 생겨날 때까지 말이다. 물론 여기서 내가 수동적 태도로 있거나 아무런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갈등이 지속되는 동안 무의식이 만들어내는 모든 일을 이해할 수 있도록 나는 환자를 돕는다. 그것이 결코 예사로운 일이 아니라는 말을 독자는 믿어도 좋을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지금까지의 나의 관심사 중 가장 중요한 것이다. 환자 또한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는 올바르게 행해야 하며, 더욱이 악이 자신의 내부에 너무 막강한 힘으로 밀어닥치지 않도록 온 힘을 다 쏟아야 한다.

그리스도는 죄인을 돌봐주었고 비난하지 않았다. 그리스도의 진정한 후계자는 그와 똑같이 행할 것이다. 또한 우리가 자기 자신에게 행하지 않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행하지 않음으로 또한 죄인을 돌보게 될 것이다. 죄인이 곧 우리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악인과 가까이 지냈다고 해서 그를 비난하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는 바로 우리 자신인 죄인에 대한 사랑이 악인과 결탁하는 일이라고 자신을 비난해서는 안 된다. 사랑은 우리를 개선하며 증오는 우리 자신을 악화시킨다.

(C.G. 융 기본저작집 5(한국 융 연구원 역): 꿈에 나타난 개성화 과정의 상징, 솔, 45-46쪽에서)


무의식과 치료자의 자세

우리는 의사가 최소한 자기의 인격에 미치는 무의식의 작용을 알기를 기대한다. 그래서 누구나 정신치료를 한다는 사람은 그전에 교육분석을 받을 것을 요구한다. 이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최선의 준비도 의사가 무의식 전체를 남김없이 알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무의식을 남김없이 󰡐비워버리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무의식의 창조적 세력들이 언제고 다시금 새로운 형상들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사실만 보아도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의식이 아무리 넓다 하더라도 그보다 더 커다란 무의식 속에 들어있는, 보다 작은 원이며 앞으로도 그렇게 있을 것이다. 의식은 대양(大洋)에 둘러싸인 섬과 같은 것이다. 바다처럼 무의식도 끝없이 언제나 스스로를 새롭게 하는 많은 생명들을 낳으며, 그것들의 풍성함은 헤아릴 수 없다.

환자와 치료자

가장 경험이 많은 정신치료자도 그를 사로잡은 환자와의 유대가 환자와 함께 나누는 공동의 무의식을 토대로 출현한다는 사실을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발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때 배열되는 원형들에 관한 모든 필요한 개념들과 지식에 통달하고 있노라고 믿는다 해도 결국 그는 학교에서 얻은 지식으로는 꿈도 꿀 수 없는 많은 것들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철저한 치료를 요하는 모든 새로운 사례는 하나의 개척작업을 의미하며 그 경우 흔적이라도 틀에 박힌 공식 치료절차가 있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임이 드러나게 된다. 그러므로 보다 높은 형태의 정신치료는 매우 까다로운 작업이며 때로는 치료자의 오성이나 공감뿐 아니라 전체인간을 도전에 끌어들이게 하는 과제를 제기한다. 의사는 환자에게 이와 같은 전력투구를 요구하는 경향이 있다. 의사는 이와 같은 요구가 효과를 거두려면 같은 요구를 그 자신에게도 적용하여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C.G. 융 기본저작집 3권 <인격과 전이>에서


총알의 탄도가 목표에서 끝나듯, 인생도 죽음으로 끝난다. 그것은 전 인생의 목표이기도 하다. 인생의 상승과 그 정상 자체는 다만 목적을 위한 수단과 단계, 즉, 죽음이라는 목표에 이르기 위한 수단이며 단계일 뿐이다. 이 역설적 공식은 인생이 목표를 향해 가고 그 목적이 정해져 있다는 사실에서 나온 논리적 귀결에 불과하다. 그렇게 한다고 내가 삼단논법적인 유희를 일삼는다고 생각지 않는다. 인생의 상승에 목표와 의미를 인정한다면 하강에 대해서는 왜 그것이 인정될 수 없겠는가? 인간의 탄생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왜 죽음은 아니겠는가?

(융 : ‘심혼과 죽음’ 에서)


우리는 생의 오후를 아침에서와 같은 프로그램에 따라 살 수는 없다. 왜냐하면 아침에 많았던 것이 저녁에는 적을 수 있고 아침에 진실이던 것이 저녁에는 진실이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삶의 이런 기본법칙에 놀라서 마음이 동요되지는 않는다. 그러기에는 너무 많은 노인들을 치료했고 그들 마음의 밀실을 들여다 보았다. 늙어가는 사람은 자기의 삶이 상승하거나 확대되는 것이 아니고 냉엄한 내면의 과정에 의해서 삶의 폭이 좁아지도록 강요받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젊은 사람들에게는 자기자신에 너무 많이 몰두하는 것이 거의 죄악이고 위험한 일이지만, 나이든 사람에게는 자기를 진지하게 관찰하는데 전념하는 것이 의무이자 필요이다. 태양은 세계에 빛을 사용한 후에는 스스로 빛을 내기 위해서 광선을 빨아들인다. 그러나 많은 노인들은 이렇게 하는 대신에 건강염려증 환자, 구두쇠, 융통성 없는 원칙론자, 지난 시절만을 칭송하는 자, 또는 영원한 젊은이가 되어간다.

(융 : ‘생의 전환기’에서)

191. 티아레   2012-04-16 05:04 (월) 

우리가 끊임없이 공부해야 하는 이유/ 이부영 한국융연구원 원장

http://www.jung.re.kr/php/board.php?board=bulletin&page=5&command=body&no=8


"이 작은 글터는 길을 찾는 사람을 위해서 꾸미기로 했다. 함께 길을 가는 사람­道伴­을 위해서, 혹은 혼자서 길을 가고 있는 사람을 위해서 만든 작은 窓이다. 아직은 매우 빈약하지만 차츰 그곳에 쉼터도 있고 茶 한 잔의 위로도 있을 터이다.

우리는 여기서 說法을 강요할 생각이 없다. 어느 길이 옳은 길이라고 제시할 생각도 없고 그럴 수도 없다. 왜냐하면 개인 개인의 가는 길은 다를 수 있고 또한 달라야 하기 때문이다.

카알 구스타브 융의 분석심리학을 통해 우리가 확신하고 있는 바는 개인은 그 자신의 전체성을 실현함으로써 사회의 성숙과 통합에 이바지한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전체가 되기 위해서 찾아가는 길은 어느 먼 땅위에, 바다 위에, 혹은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속에 있다. 마음속에서 길을 찾는 사람, 창조와 파괴를 함께 지닌 인간의 심혼 속에서 그 모든 것을 하나로 통합하는 치유의 궁극적 신비를 찾는 사람들.― 이들을 위해 이 길을 연다."

- 길을 열면서(한국융연구원 회보 '길')/ 이부영

190. 티아레   2012-04-15 13:17 (일) 

한국의 샤머니즘과 분석심리학/ 이부영/ 한길사(2012)


이 원장은 “문학은 픽션(허구)이지만, 거기에 진실이 없다고 볼 수는 없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그는 또 죽은자(귀신)와 대화를 하거나 멀리 있는 가족의 죽음을 꿈 등을 통해 인지하는 현상에 대해 “우리의 무한한 의식이 가지고 있는 ‘절대 지(모든 것을 앎)’를 통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동시성의 현상을 해석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융의 수제자이자 자신의 스승인 폰 프란츠가 “죽는다는 것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인지할 수 없는 세계로 가는 것”이라고 한 말을 전하며(...)


이 원장은 “샤먼(무당)은 엑스터시로 황홀경에 빠져 환자의 ‘잃어버린 혼’을 찾아줘 병을 고치는데, 그런 면에서 그들은 ‘정신과 의사들의 조상’”이라고 말했다.

이 원장은 이 책에서 샤먼이 되기까지 꿈과 무병을 통해 육신이 갈기갈기 찢기는 것을 비롯해 수많은 고통을 겪는 입무(入巫)과정을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그런 고행과 고통이 타인을 치유할 수 있는 힘을 갖게 한다는 것이다. 그가 이 책의 부제를 ‘고통과 치유의 상징을 찾아서’라고 한 것도 샤먼이 겪는 고통의 의미와 가치를 강조하기 위해서다.

그는 “샤먼이 힘든 고통의 과정을 겪고 자기를 넘어섬으로서 치유자로 거듭나는 것과 같이 누구나 고통을 겪고 이겨냄으로써 내적으로 강해진다”고 강조했다. 그런데도 ‘요즘은 아이들을 과잉보호해 의존심만 갖게하고, 기를 살려주기만 했지 충동을 절제하고 감내하도록 길러내지 못해 고통을 견뎌내지 못한 채 쉽게 자살 충동을 일으킨다’는 게 그의 진단이다. 그는 “어른들도 무조건 고통을 기피하고 술과 환각제로 이를 넘길 생각만 할만큼 나약해지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http://well.hani.co.kr/80659

http://news.donga.com/3/all/20120204/43780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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