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티아레   2010-04-05 15:38 (월) 

한 아이가 꽃을 들여다보다/ 박방희


소녀는 女子 이전의 女子이다

소녀는 닫힌 존재이지만 제 안으로 드는 통로를 가지고 있다 그 통로에는 비밀스런 문이 있고 그 문은 잠겨 있어 자연의 때가 되지 않으면 누구도 그 문을 열 수 없다 때로 난폭한 침입자가 강제로 열고자 해도 문은 더욱 닫힐 뿐, 소녀의 문은 안에서 열지 않으면 부서지는 문이다

소녀는 原形인 女子이다

그래서 나는 세상의 모든 少女를 사랑한다

여남은 살쯤 되어 보이는 少女가 마당에 피어 있는 꽃을 들여다보고 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꽃의 붉은 기운이 소녀의 코와 입으로 기어들어 전신으로 퍼진다 숨을 내쉴 때는 소녀에게서 빠져나온 피가 꽃 속으로 스며들며 꽃에 붉은 색을 더 하고 뜨겁게 한다 소녀는 나비가 되어 꽃 위에 날개 접고 앉아 웃는다 그 웃음이 꽃잎에 주름을 지으며 땅으로 번지고 하늘로 번진다 그 바람에 소리를 토막 내며 공중을 날고 있던 헬리콥터가 기우뚱한다

피기 전의 꽃!

나는 小女를 사랑한다

53. 티아레   2010-04-05 14:29 (월) 

음악/ 이성복



비오는 날 차 안에서

음악을 들으면

누군가 내 삶을

대신 살고 있다는 느낌

지금 아름다운 음악이

아프도록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있어야 할 곳에서

내가 너무 멀리

왔다는 느낌

굳이 내가 살지

않아도 될 삶

누구의 것도 아닌 입술

거기 내 마른 입술을

가만히 포개어본다


52. 티아레   2010-04-05 14:28 (월) 

애가 / 엄원태



이 저녁엔 노을 핏빛을 빌려 첼로의 저음 현이 되겠다.

결국 혼자 우는 것일 테지만 거기 멀리 있는 너도

오래전부터 울고 있다는 걸 안다

네가 날카로운 선율로 가슴 찢어발기듯 흐느끼는 동안 나는

통주저음으로 네 슬픔 떠받쳐주리라

우리는 외따로 떨어졌지만 함께 울고 있는 거다

오래 말하지 못한 입, 잡지 못한 가는 손가락,

안아보지 못한 어깨, 오래 입맞추지 못한 마른 입술로 ......


51. 티아레   2010-04-05 14:00 (월) 

조용한 일/ 김사인



이도 저도 마땅치 않은 저녁

철이른 낙엽하나 슬며시 곁에 내린다


그냥 있어볼 길밖에 없는 내 곁에

저도 말없이 그냥 앉는다


고맙다

실은 이런 것이 고마운 일이다


50. 티아레   2010-03-10 03:22 (수) 

아득하면 되리라 / 박재삼



해와 달, 별까지의

거리 말인가

어쩌겠나 그냥 그 아득하면 되리라.



사랑하는 사람과

나의 거리도

자로 재지 못할 바엔

이 또한 아득하면 되리라.



이것들이 다시

냉수사발 안에 떠서

어른어른 비쳐 오는

그 이상을 나는 볼수가 없어라.



그리고 나는 이 냉수를 시방 갈증 때문에

마실밖에는 다른 작정은 없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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