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술서를 쓸 준비를 시작하려 한다.
무섭다.
하기 싫다.
무엇이 떠오를까.
어떤 느낌이 들까.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일상생활을 제대로 할 수가 있을까.
오랜만의 복학인데
친구들하고 웃고 떠들고도 싶고
공부도 잘 하고 싶고
학교 생활도 잘 하고 싶은데
이런 일만 없으면 나 정말 잘 할 수 있는데.
친구들한테 인기도 많고
성적도 잘 나오고
학과 활동 같은 것도 적극적으로 잘 할 수 있는데.
못 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너무너무 슬프고 억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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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말이야
학교 생활은 언제든지 또 할 수 있어.
내년에 해도 되는 거고
내년이 안 되면 내후년에 해도 되는 거고.
내 인생을 통틀어서
가장 중요하고
절대로 지나쳐서는 안 되는
그런 중요한 일을 나는 해야 되는 거야.
그러니까 다른 것들이 하고 싶어도
조금만 참자.
못 해도 상관 없어.
언제나 잘 해야 할 이유는 없잖아.
언제나 밝고 긍정적인 모습만을 보여야 하는 건 아니야.
누가 나에게 그렇게 요구하니?
결국 그런 모습을 바라는 건 나 자신이야.
다른 사람들은 내가 어떤 모습이든
사실 자신의 모습밖에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아.
처음엔 변한 모습에 깜짝,
하고 놀라겠지만
그 다음부터는 그저 그런 거야.
다시 자신의 삶 속으로 침잠되어 가지.
나는 그저 나의 인생을 살면 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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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모습에 조금 신경을 못 쓰고
조금 우울하고
사람들과 조금 잘 지내지 못 하고
수업을 충실히 듣지 못하고
학교 생활을 잘 하지 못할 수도 있어.
그래서 친구를 많이 만들지 못할 수도 있고
그다지 중요하고 소중하고 멋진 경험을
많이 못할 수도 있어.
그렇게 조용하고 가라 앉은 학교 생활이 될 수도 있어.
하지만 말이야
나는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치 있는 일을 하느라고 그런 거야.
학교 생활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훨씬 더 나에게 소중한,
그리고 해야만 하는 그런 일.
다른 사람들 눈에는
내가 조금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겠고
멋지게 보이지 않을 수도 있을 거야.
나는 특히 전 남자친구에게
잘 사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데
사실 그러지 않아도 상관 없어.
전 남자친구 눈에 잘 비치려고
다른 사람 눈에 비치려고
내 인생을 조종하지는 말자.
나는 그저
나의 발걸음에 충실하면 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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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호흡 깊게 하고.
떠올리자.
기억 뿐만 아니라
상황과 감각,
그 때의 감정까지 모두 다.
생생하게.
그리고 분출하고 괴로워하고
해소하자.
그래야 해.
그래야 내가 자유로워질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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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도 해보고
글로 다 안 되면
작은 말하기 같은 데서 말 해보고
거기서도 다 안 되면
상담사 선생님한테도 이야기하고
친구들한테도 이야기하고.
들어줄 수 있는 모든 사람들한테 가서
내 이야기를 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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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남자친구와 헤어졌을 때
너무너무 힘든 마음에
온갖 사람들한테 징징거렸던 것처럼
그렇게 사람들한테 징징대면 되는 거야.
그러면 많은 사람들이
넓은 마음으로 나를 받아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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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아
하나씩.
천천히.
많잖아
셀 수도 없으니까.
좀 오래 걸릴 거야, 통과하기까지는.
하나도 대충 넘어가지말고
제대로 짚고 넘어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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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살,
그 날부터
8살, 9살, 10살, 11살, 12살, 13살,
14살의 그 1년
15살, 16살
17살의 극적인 탈출
18살, 19살,
20살 이혼까지,
13년을.
정리하는 거야.
그리고 벗어나는 거야.
22년 동안의
끔찍한 징역살이에서
탈출하는 거야.
오로지 나를 위해.
나만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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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년을 정리하는 데는
그만한 시간이 들 거야.
똑같이 들지는 않겠지만
짧지는 않을 거야.
각오 단단히 하고.
준비도 단단히 하고.
잘해보자.
살아남자.
약속해.
힘들어도
자신을 해치는 행동은 하지 않기.
꼭.
내 잘못이 아니야.
나를 미워하진 말아.
그를 미워해.
그의 형상을 해쳐.
상상 속에서 그에게 분노를 표출해.
몇 번이고 죽여도 좋아.
내 몸에 그러지는 말자.
나 자신을 죽이지는 말자.
나를 혐오하지 마.
가장 가까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사람이 나를 하찮게 여겼다는 이유만으로
나까지 그래서는 안 돼.
나는 나를 가장 소중하게 여겨야지.
나 자신에게 가장 착한 사람이 되어야지.
.
.
나 자신에게 관대하기.
나를 용서하기.
나를 사랑하기.
나 자신을 죽이지 않기.
절대로.
이 시간은 지나가.
반드시 지나갈 거야.
죽지 않고 통과 했을 때
나를 마중나와
기다리고 있을 행복을 생각해.
반드시,
반드시 행복해질 수 있어.
다 통과할 수 있고
다 지나갈 거야.
기억해.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