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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장님의 라면/ 양승드 논설위원/파이낸셜뉴스/7.16   신문 칼럼
조회: 2313 , 2014-07-18 23:16

회장님의 라면/ 양승드 논설위원/파이낸셜뉴스/7.16

조계사 옆 옅은 하늘색의 나지막한 구식 건물. 2층 안쪽의 회장실은 늘 조용했다. 찾아오는 손님도 많지 않았다. 회장님은 외출도 않은 채 방에서 혼자 점심을 들 때가 적지 않았다. 단골 메뉴는 자신의 회사가 만든 라면이었다. 회사가 직영하는 시식 코너에서 조리된 것이었다. 젓가락 대신 포크로 면발을 돌돌 말아 들기도 했다. 노 회장의 점심 식탕에 오른 건 라면 사랑과 자부심 그리고 고독이 전부였다.

그제 영결식을 치른 고 전중윤 삼양식품 명예회장은 우리나라 식품산업의 개척자이자 큰 산이었다. 1961년 42세의 나이에 삼양식품을 세운 후 국내 시장에 처음으로 인스턴트 라며을 선보인 고인은 먹거리 절대 부족의 국가적 고민 해결에 큰 공을 세웠다는 데 강한 자부심을 가져 왔다. 그가 새로 뛰어든 사업도 축산, 유가공 등 식품과 관련된 업종이 대부분이었다. 이런 그에게 '식품업계의 대부'라는 닉네임이 따라다닌 건 당연했다.

그러나 기업가로서 고인의 말년은 불운했다. 1989년 11월에 터진 우지 파동은 모든 것을 날려버렸다. 공업용 소기름으로 라면을 튀겼다는 익명의 투서가 검찰에 날아들면서 시작된 사태의 후폭풍은 끔찍했다. 회사는 악덕기업으로 낙인 찍히면서 반품소동 속에 라면시장 챔피언에서 마켓셰어 10% 이하의 군소업체로 추락했다. 회사가 망하기 전 퇴직금이라도 받겠다며 1000명에 가까운 직원이 줄줄이 떠나갔다.

'정직과 신용'이 자신의 경영 신념이라며 아무리 진실을 얘기해도 검찰은 물론 세상도 귀를 열어 주지 않았다. 8년 뒤인 1997년에야 대법원으로부터 최종 무죄판결을 받아냈지만 피해보상의 길은 막막했다.

우지파동 후 고인은 부쩍 말이 없어졌다. 검찰은 물론 세상에 대해서도 유감이 많은 듯했다. "장난 삼아 던진 돌이 개구리 목숨을 앗아갈 수 있다는 걸 왜 모르느냐"는 말로 애타는 심경을 드러내기도 했다. 공명심을 앞세운 무리한 수사가 기업 생명을 끊을 수 있다고 항변하는 뜻으로 비쳤다. 언론과도 접촉을 끊었다. 회고록을 꼭 남기셔야 한다며 1990년대 중반 어느 날 서울 신교동 자택 앞에서 한밤중 '뻗치기'에 들어갔던 필자에게는 대문 사이로 메모가 전해져 왔다.

"하고 싶은 말은 있지만 아직 때가 아니다..."라고.

대관령과 강원도 사랑이 각별해 틈날 때마다 이곳을 찾았던 그는 대관령 삼양목장 내 선영하에 묻혔다. 뒤늦게나마 고인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