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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프지도 않다면 사람이 아니다.   주소록
조회: 980 , 2005-04-14 14:30
아프지도 않다면 사람이 아니다.      
      

  
아프지도 않다면 사람이 아니다<1>

1. 병이 든다는 것, 반성작용이 살아있다는 반증이다

인간이 아프고 병든다는 것, 자연스러운 것이다. 정말 아프지도 않고 병들지도 않는다면 인간이 아니다. 아파해야 할 때 아파하고 병들어야 할 때 병들어야 인간이다. 우리 모두가 아프기를 싫어하고 병들기를 싫어하지만 그러나 몸이 아프고 병든다는 것, 실은 정직한 반성작용이다. 몸의 무의식적 반성작용이다. 무언가 잘 못되어간다는, 잘 못하고 있다는, 잘 못 살고 있다는 반성작용이다. 몸이 그렇게 말해주는 것이다.

그 점을 무시하고 외면할 일이 아니다. 역설적이지만 아프고 병들 수 있다는 것이 건강하다는 이야기다. 왜냐하면 반성작용이 살아있다는 것, 그것이 건강하다는 반증이기 때문이다. 이미 반성작용이 죽어버려서 마구 살아도 아프지 않고 병들지 않는다면 살인을 하고, 강도짓을 하고, 무슨 악행을 다해도 까딱없다면 이것이야말로 보통 깊은 병이 아니다.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다는 것은 반성작용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잘못을 행하고 그러나 그것을 반성하고 바로잡을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반성작용이 있는 인간은 역사를 말할 수 있다. 동물에게는 역사가 없고.

2. 질병의 메시지

그래서 몸이 아프고 병이 들 수 있다는 것,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인간다운 것이다. 문제는 몸이 아프고 병들었을 때, 그 경고의 메시지를 정확하게 읽고 무어가 잘 못되어 있는지, 그것을 바로 잡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질병을 치유하고 건강해져야 한다. 그렇게 치유하면서 인간은 성숙하고 발달하는 것일 터이다.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는 것’ 그냥 하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질병이 갖는 반성작용의 의미를 무시한다. 몸이 우리에게 일러주는 간절한 경고의 메시지를 외면한다.

간단한 예를 들어보자.
가령 ‘소화불량’ 상태에 빠지면, 우리는 통상적으로 음식물의 소화능력이 떨어진 것으로 생각하고 소화제를 먹는 것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정작 ‘소화불량’의 원인은 묻지 않는다.

사실 위장장애가 생기고 소화불량이라는 현상으로 나타나게 되는 경로는 다양하다. ‘소화능력’이라는 것, 그것이 단순한 음식물의 소화능력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관계의 소화능력, 또 사회적 관계의 소화능력, 일의 소화능력 이런 것들이 원활하지 않을 때 위장이 소화능력이 저하되고 심해지면 위장장애 현상으로 올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소화’불량‘이란 것이 소화제나 먹어서 해결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과음 과식으로 인해 소화불량이 오는 것도 그렇다. 그것도 따지고 보면, 과음 과식을 하게 되는 정신적 메커니즘이 반드시 있는 것이다. 그것을 바로 잡지 않고 소화제나 먹어서 임시적으로 고통을 해소한다면 그 사람의 소화불량은 결코 바로 잡아질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소화제를 먹어서 임시적으로 일시적으로 그 소화 장애를 해소시킨다는 것, 그것은 차라리 질병을 더 고착시키고 병을 더욱 깊게 만들 수 있다. 소화제에 의존하면 할수록 자신의 자생력, 자기 치유력을 죽여 간다.

더 냉정하게 말하면 근본적 원인 자체를 은폐시키고 정신과 육체를 더욱 분열시킨다. 몸이 말해주는 경고의 메시지를 무시하게 만들면서 자신의 내면세계와 단절하게 만든다. 달리 말하면 안과 밖이 따로 놀게 만드는 것이다. 요컨대 반성작용 자체를 죽여 간다. 무얼 잘 못 해서 병에 걸렸는지를 묻지 않게 하고 병이 들고 병이 낫는 인과(因果) 자체를 무시하게 하는 것이다. 무서운 이야기가 아닌가?

3. 정신적으로 무너진 다음에야

그래도 환자들은 우선 낫고 보자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근본적인 원인이 어떻든 간에 자생력이 어떻고 반성작용이 무어고 간에 낫고 보자는 생각으로 달리게 된다. 환자의 심정이야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낫고 보자’는 생각을 한다고 빨리 나을 수 있을까? 그 점을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간단한 소화불량 같은 경우라면 소화제나 먹어서 해소하면 그만이지만 그러나 만성병, 악성질환 같은 것들은 그렇게 되질 않는다. 마땅한 약도 비법도 없다. 정말 정확한 투병방식을 선택하지 않으면 회복을 기대하기 어렵다.

가령 악성질환에 시달리는 환자들을 보게 되는데 간암이다, 폐암이다, 위암이다 등등, 그래서 주변에서는 이것이 좋다, 저것이 좋다 갖가지로 병에 좋다는 약과 음식을 권한다. 또 별별 건강법을 다 권한다. 그래서 환자들은 급한 마음에 좋다는 것은 다 해본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병이 낫는 경우는 드물다. 오히려 명을 단축하고 병이 악화되는 경우를 더 많이 보게 된다. 좋다는 것을 다 해 보았지만 결과는 좋아지지 않는 것이다. 왜일까?

필자의 소견으로는 그렇다. 환자가 좋다는 것을 이리 저리 따라 하면서, 정신적으로 먼저 무너져 버리기 때문이라는 생각이다. 달리 말하면 자신의 면역체계, 방어체계가 그렇게 해서 더 빨리 무너져 내리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4. 질병의 인과를 직시할 수 있다면

병이 들 수 있다면 나을 수도 있는 것이다, 병이 드는 경로가 있다면 나을 수 있는 경로도 반드시 있기 마련 아닐까? 그런 것이라면 병에 대해서 병의 원인에 대해서 정면으로 당당하게 마주서는 그것이 최선의 투병자세가 아닐까? 그렇지 않고 병에 끌려 다니면서 병의 원인은 외면한 채, 병이 낫기를 바란다는 것은, 그것도 이 사람 저 사람의 주문에 따라 끌려 다니는 것은, 자신이 회복할 가능성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과 다름없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여기서 극적인 사례를 들어보자. 가령 말기 환자들 가운데 마침내 투약을 포기하고 기도를 하면서 기적적으로 회복했다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기독교이건, 불교이건 그 점은 관계할 바가 없는 것 같고,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본 즉 이런 공통점을 발견하게 된다.

처음에는 살아야겠다는 일념으로 그리고 살려달라는 애절한 심정으로 기도를 하는데, 그러나 정작 기도를 하다 보면, 기도를 하면 할수록, 자기 자신이 ‘죽일 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더 이상 살아야 할 가치가 없는 인간, 죽어서 마땅한 인간이라는 점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살아야겠다는 그리고 살려달라고 시작했던 기도가 어느 새 참회의 기도로 바뀐다고 한다. 그때 몸이 기적적으로 회복된다는 그런 이야기다.

그러니까 이런 이야기들이 의미하는 바는 그렇다. 병의 원인에 정직하게 직면하면서, 그래서 병이 걸리게 된 인과를 직시하고, 그 근본원인을 바로 잡고자 하는 순간 -그것을 참회라고 하는 것 같다- 병이 낫는다는 것이다. 요컨대 병의 인과를 정직하게 받아들이는 순간 자신의 자생력과 자기 치유력이 작동되면서 병으로부터 회복된다는 이야기가 아닐까?

이런 이야기를 한 것은, 종교에 귀의하거나 기도를 하는 것이 투병의 최선이라고 말하고자 함이 아니다. 그리고 약을 손대지 말라거나 또 음식물을 무시해도 좋다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질병에 정면으로 마주서라는 것, 병이 들게 한 것도 나 자신이기에 그저 낫기만을 바라지 말고, 결과만을 챙길 생각을 하지 말고 그 원인을 돌아보라는 것,그래서 병의 인과를 받아들이고 병의 원인을 직시할 수만 있다면 그 원인을 제거하고 극복할 수 있는 길은 반드시 보인다는 것이다.

이미 병이 들 수 있다면, 병의 인과를 알아볼 능력도 있는 것이며 또한 자신을 병들게 했으면 자신을 낫게 할 자생력과 자기 치유력도 동시에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인과를 겸허히 수용할 수 있을 때, 자생력과 치유력은 작동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과를 받아들일 수 있는 당당할 수 있는 자세, 이것이 올바른 투병의 자세가 아닐까 한다.
/배영순교수(영남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