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토피아와 좌파 바바리맨
슬라보예 지젝의 <시차적 관점>을 읽다가 ‘유물론적 신학’이라는 표현을 만났다. 신학과 유물론의 모순적 결합을 지젝은 이렇게 정당화한다. “데리다는 (…) 오늘날에는 오직 무신론자들만이 기도를 할 것이라고 지적한다. 이 수사법에 반하여 우리는 신학자들만이 유일하게 진정한 유물론자라는 라캉의 주장이 가진 진리를 주장해야 한다.” 이 역설은 일상적인 것이다. 사실 돈의 전능을 인정하는 강남 부자 교회의 목사들이야말로 진정한 유물론자이며, 세상엔 돈보다 중요한 게 있다고 믿는 좌파들이야말로 진정한 관념론자가 아닌가.
하지만 이 흥미로운 모순의 저작권은 사실 지젝이 아니라 발터 베냐민에게 돌아간다. 흔히 ‘역사철학테제’라 불리는 베냐민의 에세이 <역사의 개념에 관하여>에는 아직까지도 학자들 사이에 분분한 해석을 낳는 베냐민 특유의 알레고리들이 등장한다. 대표적인 것이 파울 클레의 그림과 함께 등장하는 우울한 역사의 천사, ‘앙겔루스 노부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고 또 아리송한 것이 바로 ‘역사철학테제’의 서두에 등장하는 자동인형의 알레고리다.
유토피아적 발상에 대한 역설
“널리 알려지기를 상대가 수를 두면 맞수를 두어 늘 승리하도록 만들어진 자동인형이 있었다. 터키 옷을 입고 입에 수연(水煙) 파이프를 문 인형이 커다란 테이블 위에 놓인 체스판 앞에 앉아 있다. 테이블은 거울 시스템을 이용하여 안이 비어 있는 것처럼 보이나, 실은 그 안에 체스에 능한 등 굽은 난쟁이가 들어앉아 끈으로 인형의 손을 조정하고 있다. 철학에서도 그런 것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사적 유물론’이라 부르는 인형은 늘 승리해야 한다. 그 누구와도 싸워서 이기려면 그것은 신학의 힘을 빌려야 하나 오늘날 신학은 왜소하고 추해져서 들여다보여서는 안된다.”
그 난쟁이의 이름을 베냐민은 ‘신학’이라 부른다. 그 누구와도 싸워 이기기 위해 과학적 유물론은 신학의 도움을 받아야 한단다. 이게 무슨 뜻일까? 지젝의 책에서 ‘유물론적 신학’이라는 표현과 마주치는 순간, 불현듯 내가 5, 6년 전에 어느 인터넷 게시판에 올렸던 글이 떠올랐다. 자기 인용을 통해 그리로 다시 돌아가보자.
이 알레고리에서 등 굽은 난쟁이, 즉 ‘신학’은 곧 유토피아의 철학을 가리킨다. 유토피아적 발상이 없었다면 세상은 오늘날 우리가 가진 것만큼 발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또한 몇몇 몽상가의 유토피아가 세상을 디스토피아로 만들어버린 경험을 갖고 있다. 여기서 유토피아는 있어야 하되, 동시에 있어서는 안된다는 역설이 성립한다. 이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베냐민의 자동인형은 바로 그 해결책으로 제시된 것이리라. 즉 난쟁이(유토피아)는 실제로 작동해야 하나, 그의 작업은 결코 겉으로 드러나서는 안된다.
역사의 텔로스(telos), 즉 인류의 최종 목적이 되는 이상사회를 그려놓고 현실을 강제로 그리로 옮긴다는 발상은 시대착오다. 우리는 이미 ‘역사이후’(posthistoire)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유토피아를 포기할 수는 없다. 우리가 현실로 누리는 것이 한때는 실현 불가능한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 때문에 이상사회의 꿈은 존재해야 하되 동시에 존재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터키 인형이 되어 하는 말, 쓰는 글, 하는 행동은 유토피아의 열망에 조종되어야 하나, 그 꿈 자체는 난쟁이처럼 가려져 있어야 한다.
존재하면서 부재해야 하는 유토피아
과거의 유토피아는 완성태로 존재했다. 어떤 이들은 이 설계도를 그대로 현실로 옮기려 했다. 하지만 오늘날 ‘유토피아’가 아직 살아 있다면, 그것은 존재하면서 부재해야 한다(데리다라면 ‘존재하는 동시에 부재하면서’ 작동하는 이것을 ‘디페랑스’라 부를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냐고? 존재하면서 부재하는 것은 과학적으로도 가능한 현상이다. 가령 촉매를 생각해보라. 화학반응에서 촉매는 그 자체론 화학적 결합물에 들어가지 않으나 그것 없이는 화학반응이 일어날 수 없다. 유토피아는 촉매와 같은 것이어야 한다.
내가 좌파 바바리맨을 싫어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21세기에 여전히 긍정적 유토피아 문학을 하는 그 지적 게으름도 맘에 안 들지만, 대중 앞에 옷 홀딱 벗고 빨간 자지, 노란 자지 심판하는 행태는 내 성 취향을 심히 거스른다. 현실은 무섭게 돌아가는데, 거기에 결합될 생각은 하지 못하고, 제 자지 색깔의 원색성을 근거로 남들에게 ‘자유주의자’니, ‘프티 부르주아’니 딱지나 붙이는 것은 그냥 중세적 악습일 뿐이다. ‘종교재판’(inquisition)의 어원은 라틴어 1인칭 ‘내가 묻노라’(inquisitio), 즉 남의 신앙적 정체성을 묻는 질문이었다.
언어 게임에서 ‘유토피아’가 하는 역할을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 역사에 텔로스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현실에서 어떤 정치적 목적을 설정하는 것 자체가 불필요하거나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유토피아는 구체적으로 터져나오는 사안을 판단하는 데에 나아가 사안에 대처하는 대안을 만드는 데에 은밀히 작동해야 한다. 마치 촉매처럼. 이번 선거를 통해 이루어진 무상급식을 생각해보라. 그것은 사실 그리 급진적인 요구가 아니나, 평등사회의 유토피아를 향한 중요한 한 걸음이 아니던가.
우리는 결코 유토피아에 도달할 수 없다. 그것은 ‘아무 데도 없다’를 의미하는 그 낱말의 뜻 속에 이미 함축되어 있다. 우리는 거기에 그저 무한히 근접할 수만 있을 뿐이다. 그것도 현실에서 유리된 실험실에서 사유하는 한두 사람의 레토르트 몽상을 통해서가 아니라,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문제들을 가지고 씨름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론과 실천을 통해서. 유토피아를 그림에 비유하자면 그것은 삶에서 유리된 정치적 수도원에 사는 몽상가들이 그리는 유화 작품이 아니다. 그것은 삶을 사는 수많은 이들의 꿈의 조각으로 이루어진 퍼즐이다.
이른바 ‘좌파’에 부족한 것은…
불행히도 우리는 지금 우리가 추구하는 유토피아의 모습을 보지 못한다. 하지만 언젠가 오랜 세월이 지나 되돌아보면 우리의 꿈이 이미 실현되어 있음을 비로소 깨닫게 된다. 유토피아의 모습은 한 몽상가의 ‘비전’ 속에서 미리 보이는 것이 아니라, 먼 훗날 투쟁하는 세대의 집단적 꿈속에서 ‘기억’으로 뒤늦게 현현하는 것이다. 유토피아라는 이름의 난쟁이는 거울의 반사를 이용해 등을 구부리고 책상 속에 숨어야 한다. 현실에서 우리는 은밀히 그의 조종을 받는 터키 인형이 되어야 한다.
유물론적 과학이 왜 신학의 조종을 받아야 하는가? 그것은 유토피아의 실현이 과학으로 대체할 수 없는 세속 종교적 신앙,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비합리적 열정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지젝은 말한다. “신학적 차원- 베냐민에 따르면 이것 없이는 혁명이 승리할 수 없다- 이 바로 충동 과잉의 차원, ‘지나치게 많음’의 차원이 아닌가?” 사실 광적인 예수쟁이들의 문제는 열정의 과도함에 있는 게 아니다. 그들의 문제는 시도 때도 없이, 아무 데서나, 아무한테나 드러내는 데에 있다. 이는 좌파 신학자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신학은 타인을 심판하는 기준이 아니라, 자기를 움직이는 동력이어야 한다. 목소리 높은 좌파들이 번번이 그들이 ‘주사파’라 경멸하는 이들에게 패배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른바 ‘좌파’에 부족한 것은, 홍세화 선생이 지적했듯이, 자기를 움직이는 열정이다(지젝은 이를 프로이트-라캉의 ‘충동’으로 해석한다). 또 다른 이유가 있다면 이른바 ‘주사파’들은 자기의 난쟁이를 감춰놓고 터키 인형으로 행동할 줄 안다는 것이리라. 불행한 것은, 그 훌륭한 습성이 심오한 철학적 이해가 아니라 국가보안법의 현존에서 비롯되었다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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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1.
왜 열정이 필요한가? 그것은 모든 이성적인 것의 토대는 사실 비이성적인 것에 있기 때문입니다. 가령 조례의 올바름은 법률로 판단하고, 법률의 올바름은 헌법으로 판단하나, 헌법 자체를 정당화하는 것은 사법적 논의가 아닐 겁니다. 복잡한 논의니, 이쯤 해 두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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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아이콘] 촛불은 왼쪽에서도 오른쪽에서도 깜박인다
시차적 상황과 계급모순
‘시차’란 특정한 천체가 관찰자의 위치에 따라 다른 곳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을 가리킨다. 가령 지구에서 특정한 별의 위치를 관측한다고 할 때, 그 별의 위치는 지구가 공전궤도의 한쪽 끝과 다른 쪽 끝에 있을 때 각각 다르게 나타날 것이다. 천문학자들은 이를 이용해 지구에서 그 별까지의 거리를 측정하곤 한다. 시차는 우리의 일상에 속하는 현상이기도 하다. 가령 무대 중앙에서 노래를 하는 가수가 왼쪽 관객에게는 오른쪽 배경 앞에 있는 것처럼 보일 것이고, 오른쪽 관객에게는 마치 왼쪽 배경 앞에 있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페미니스트, 생태주의자, 그리고…
천문학의 ‘시차’란 관찰 위치에 따른 대상의 ‘상대적’ 위치 변화를 의미한다. 그저 주관적으로 다르게 보일 뿐 대상 자체가 객관적으로 위치를 옮기는 것은 아니다. 슬라보예 지젝이 말하는 ‘시차적 관점’(Parallax View)은 이보다 더 복잡한 현상을 가리키는 것 같다. 가령 양자역학에 따르면 관찰하는 행위가 대상의 상태를 변화시킨다. 즉 동일한 대상이라도 관찰자 A와 B가 볼 때 각각 객관적 상태 자체가 달라진다는 얘기다. 쉽게 말하면 무대 위의 배우가 실제로 왼쪽에서 볼 때에는 오른쪽으로, 오른쪽에서 볼 때는 왼쪽으로 자리를 옮기는 격이랄까?
천문학의 ‘시차’에는 논리적으로 어려운 점이 하나도 없다. 관찰자 A와 B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외려 그 차이 덕분에 관찰대상이 되는 천체의 위치를 객관적으로 확정할 수 있다. 하지만 양자역학의 세계에서 A와 B의 시차는 종합에 이를 수가 없다. 거기서 얻어지는 것은 동일한 대상에 대한 서로 다른, 나아가 서로 모순되는 두개의 기술뿐이다. 물리학에서 빛을 입자이자 파동으로 규정하는 것 역시 같은 경우에 속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른바 ‘인간의 조건’이라는 벽에 부딪히게 된다. 철학자 칸트는 이를 ‘이율배반’이라 불렀다.
정치에 관한 담론도 이와 유사한 곤혹스러움을 낳곤 한다. 가령 사회주의자들은 사회를 두개의 적대적 계급으로 나눈다. 이른바 ‘계급 모순’을 중심으로 사고를 하는 그들에게 때로는 페미니스트들의 투쟁이 배불러 보일 것이다. “대부분의 프롤레타리아 여성은 먹고살기조차 힘들고, 먹고살 만한 배운 여자들이 소일거리로 하는 운동은 당연히 부르주아적 한계에 갇혀 있게 마련이다.” 이게 어디 사회주의자들만의 생각이겠는가? 언젠가 개혁당의 유시민씨가 “해일이 몰려오는데 조개나 줍고 있다”며 당내 여권주의자들을 질타하는 것을 본 기억이 있다.
하지만 하나의 눈에 그저 ‘조개’만큼 사소한 것이 다른 눈에는 ‘해일’만큼 중대한 사태일 수 있다. 가령 페미니스트들은 사회를 두개의 성으로 나눈다. 이른바 ‘성적 차별’을 중심으로 사고하는 그들의 눈에는 사회주의자들의 투쟁 역시 때로 남성 독재의 또 다른 형태로 보일 거다. 아주 오래전에 이 잡지의 취재팀장을 지낸 최보은씨는 운동권 출신이었던 당시의 남편이 자신에게 폭력을 행사한다고 당당하게 폭로했다. 우연히 술자리에서 만난 그는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는 것도 어떤 의미에선 진보일 수 있다”고 말함으로써 나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이런 현상은 도처에서 볼 수가 있다. 가령 생태주의자들을 생각해보자. 그들은 세계를 ‘인공과 자연’으로 나눈다. ‘자연 대(對) 인간’의 대립을 중심으로 사고하는 이들에게 좌우의 문제는 그저 부차적 대립, 결국 자연정복의 산물을 어떻게 나눠먹느냐의 문제일 뿐이다. 좌파는 그 산물을 사회적으로 분배하자고 주장하고, 우파는 그것을 사적으로 소유하자고 주장할 뿐, 자연을 ‘자원의 보고’로, 착취의 대상으로 보는 데서는 둘 다 공범관계에 있다는 얘기다. 가령 몇년 전 수돗물 불소화를 둘러싸고 벌어진 생태주의자와 사민주의자의 논쟁을 생각해보라.
입장에 따라 달라지는 세계
흔히 ‘포스트모던’이라 칭해지는 여러 담론의 바탕에는 강한 무정부주의적 성향이 깔려 있다. 무정부주의자의 입장은 어떤가? 권력과 개인의 관계를 중심으로 사고하는 그들에게 아마도 좌와 우의 대립은 그리 중요한 게 아닐 거다. 그들에게 사회주의나 자본주의나 어차피 근대적 권력이 낳은 쌍생아일 뿐이다. 물론 사회주의자들은 최종적으로 국가의 소멸을 말한다. 하지만 현실사회주의는 유감스럽게도 그 어느 체제보다 강력한 국가주의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사실 민주를 위해서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필요하다는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자기가 가진 입장에 따라 세계는 달라 보이게 마련이다. 물론 저마다 자기의 가치는 ‘해일’만큼 중요하며, 거기에 비하면 다른 문제들은 ‘조개’만큼 하찮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모든 입장의 차이를 넘어 정말로 중요한 가치는 무엇일까? 유감스럽게도 그것을 판정해줄 객관적 기준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경우 철학에서는 흔히 ‘통약불가능성’에 대해 말한다. 다시 말해 이들 입장을 서로 객관적으로 비교할 수 있게 해주는 공통의 지반은 존재하지 않는다. 누군가 제 입장이 바로 그 공통분모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무지막지한 독단이리라.
말로 상대주의를 선언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문제는 현실이 우리에게 선택을 강요한다는 데 있다. 어떤 가치가 진정으로 중요한지 말해줄 객관적 기준 없이 우리는 살기 위해 선택을 해야 한다. 그렇다면 그 선택을 대체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을까? 또 그 선택이 선택되지 않은 다른 입장들에 부당한 것이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려운 것은 이런 물음에 대답하는 것이다. 가치의 다원성을 인정하면서도 실천에서 상대주의에 빠지지 않는 길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아마도 지젝이 말한 ‘시차적 관점’이 그 해답이 될지 모르겠다.
촛불을 생각해보자. 전통적 좌파에게 촛불집회는 그저 부르주아적 한계 내의 자유주의 운동일 뿐이다. 그들의 눈에는 촛불대중이 자기들 오른쪽에 있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촛불대중을 광장으로 부른 이유 중 하나는 ‘쾌락’, 즉 어떤 상부의 지시 없이 권력이 미치지 않는 해방구에 순수하게 자발적으로 모인 데서 오는 즐거움이었다. 이 무정부주의적, 자율주의적 욕망의 주체들은 외려 자신들을 지도하려 드는 전통 좌파들이 자신들의 오른편에 있다고 느꼈을 거다. 실제로 촛불대중은 현장에서 운동권식 지휘에 강한 반감을 드러냈다.
사유의 새로운 습관
전통 좌파는 촛불대중이 오른쪽에 있다고 느끼고, 촛불대중은 외려 전통 좌파가 오른쪽에 있다고 느낀다. 하지만 이는 동일한 현상에 대한 주관적 느낌의 차이에 불과한 게 아니다. 촛불대중이 전통 좌파의 오른쪽에 있는 상황, 그리고 전통 좌파가 촛불대중의 오른쪽이 있는 상황은 주관적 평가라기보다는 사태에 대한 객관적 기술에 가깝다. 촛불대중은 ‘실제로’ 전통 좌파의 오른쪽에 있고, 동시에 전통 좌파의 왼쪽에 있다. A가 B의 왼쪽에 있으면서 동시에 오른쪽에 있다는 것은 일종의 이율배반이다. 이것이야말로 전형적인 시차적 상황이다.
여기서 “A도 옳고, B도 옳다”고 말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현실에서 이 두 입장이 때로 첨예하게 대립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빛이 동시에 파동이자 입자다. 하나의 규정이 다른 규정을 부정하나, 그러면서도 둘 다 빛에 대한 올바른 기술이다. 시차적 관점이란 이렇게 서로 충돌하는 두 입장을- 마치 힘껏 당겨 묶은 활줄처럼- 그 팽팽한 긴장 속에서 함께 유지하는 사유의 새로운 습관이다. 그것이 얼마나 실천적으로 효용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A만이 옳다’, 혹은 ‘B만이 옳다’는 독단보다 우리를 현실에 더 가깝게 데려가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