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날 너는 죽었다.   일기장
  hit : 1259 , 2021-05-31 00:03 (월)
  평범한 날 너는 죽었다. 네가 언젠가는 생각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생각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평범했던 날 너는 죽었다. 네 머리 속은 후회로 가득 차기 시작한다. 너는 네 삶을 안정적인 궤도로 올리는 것 조차도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 오븐에 들어가지 못하고 썩어버린 반죽처럼 네 삶이 끝났다.

  무겁고 차가운 금속에 부딪힌 너의 몸은 어색하게 무너져 있고 신경이 점점 무뎌지는 것이 느껴진다. 네 생사를 확인하는 사람들의 외침도 여러겹의 벽 안에서 듣는 것처럼 뭉개져간다. 고통이 없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일까. 너는 이제 너의 의식이 다른 차원으로 옮겨가는 것을 느낀다.

  저기 앞에 긴 터널이 보인다. 뿌옇지만 저 멀리서 빛이 보인다. 터널을 지나자 온통 하얀 빛만이 가득하다. 이상할 정도로 따뜻한 느낌이다. 오래 마음을 터놓고 지낸 친구 앞에 있는 것처럼 부드럽고 편안한 기분이 멀쩡할 리 없는 너의 망가진 가슴 안을 가득 메운다. 너는 어떤 시선을 느낀다. 전혀 위협적이지 않은 친근함이 가득한 시선을. 너와 너의 아버지가 서로를 조금만 더 이해했다면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이 바로 이랬으리라.

  따뜻한 시선이 너를 한동안 감싸고 나는 드디어 입을 뗀다. 너는 어쩔줄을 몰라 한다. 너는 네가 평생 살면서 수없이 지었던 그 어색한 표정을 짓는다. 가여운 감정이 들어 나는 너를 꼭 껴안는다. 이제 괜찮으니 편안히 있어도 된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싶다. 하지만 한동안 내 품 안에 있던 너는 내가 말하기도 전에 그 사실을 깨달은 것 같다. 나는 부드러운 동작으로 너를 안았던 손을 풀고 너를 지긋이 쳐다본다.

  나는 너에게 말한다. 너는 죽었다. 교통사고였고 가해자는 평범한 사람이다. 너는 충격을 받은 듯 하다. 말을 잇지 못하는 네 모습이 가엾다. 너는 너의 가족 얘기를 한다. 겉으로는 친밀해보였지만 누구보다 멀었던 너의 어머니와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얇은 민망함의 천을 걷어내지 못하고 진정한 가족이 되지 못했던 형에 대해서, 그리고 너의 죄책감과 말로 어찌할 수 없는 화, 사랑으로 가득찬 너의 아버지와의 관계를. 살면서 미처 표현하지 않은 감정들을 보상이라도 받아내려는 듯이, 너는 지금 격렬하게 토해내는구나.

  한 번 더 죽어도 상관없다는 듯이 소리 지르던 너는 이제 좀 괜찮아 지는 것 같다. 그리고는 풀죽은 목소리로 이젠 네가 이루지 못한 꿈을 얘기하는구나. 조금 더 편안해진, 하지만 더욱 강한 아쉬움이 배인 목소리로.

  이제 넌 네가 사랑하던 사람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하는구나. 직장에서 그녀를 처음 만났던 날과 퇴근하던 어느 날 처음보는 아파트 단지로 들어가 그녀에게 전화할까 말까 수백번 고민하고 전화 걸던 날. 그 전화를 받지않아 크게 실망하고 동시에 조금은 안심했던 너의 모습을 너는 말한다. 전보다 훨씬 부드러운 목소리와 밝아진 얼굴로, 심지어는 조금씩 웃기까지 하는구나! 정말 보기 좋다.

  많은 말들을 쏟아낸 너는 지쳐서 쓰러진다. 전력질주를 끝낸 선수처럼 너는 바닥에 누워서 숨을 고르고 있다. 나는 너의 옆에 앉아 어깨를 토닥인다. 이제 좀 쉬라고. 너는 눈을 감고 가만히 있는다. 이내 너는 몰려오는 피로를 이기지 못하고 잠에 빠져든다. 나는 네가 깨지 않게 천천히 너를 들어올린다. 그러고는 너를 서서히 무너뜨린다. 팔을 몸 안으로, 다리는 그 다음, 머리.. 허리...

  너는 이제 사람이 아닌 하나의 작은 반죽 형태가 된다. 나는 그 반죽을 동그랗게 빚어 타원형으로 만든다. 어찌보면 살색의 작은 달걀같기도 하다.

  나는 그 달걀을 다시 세상으로 보낼 준비를 한다. 이번에는 조금 더 안온한 삶이 되길 바라면서. 나는 입김을 후- 불어 그 달걀을 붕 뜨게 만든다. 그것은 둥실둥실거리며 조금씩 조금씩 위로 올라간다. 일정한 간격을 띄고 위로 떠오르는 모습이 마치 네가 숨을 쉬는 것 같다. 순간 그것은 위로 쑥 올라가더니 퐁-하는 소리를 내고 네가 왔던 곳으로 되돌아간다.

  그것은 어느 엄마의 뱃 속으로 쏙 하고 들어간다. 이제 너는 숨소리의 템포를 새로운 엄마의 것과 맞추기 시작하는구나. 흡-하고 마시고, 후-하고 내쉬고

흡-하고 마시고, 후-하고 내쉬고
흡-하고, 후-하고

흡-하고
후-하고

흡-하고

후-하고

흡-

후-



프러시안블루  21.06.01 이글의 답글달기

이 구절 참 좋네요.
"겉으로는 친밀해보였지만 누구보다 멀었던 너의 어머니와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얇은 민망함의 천을 걷어내지 못하고 진정한 가족이 되지 못했던 형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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