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는 바다가 되어야만 하는가   좋았던 글
  hit : 1221 , 2021-05-31 00:24 (월)
파도는 바다가 되어야만 하는가

  중학교 때 공익광고를 본 적이 있다. 어둑어둑한 지하철 벽면에 붙어있었던 것이다. 어린아이가 아버지로 보이는 남성에게 맞고 있었고, 그 아이는 자라서 친구들을 때렸으며, 성인이 되어서는 다시 자신의 아버지가 있었던 자리로 돌아가 제 아이를 학대하는 그림이었다. A3용지에 간략하게 프린팅된 가상의 인생을 나는 무감각하게 지나쳤다. 맞고 자란 애가 커서도 때린다더니, 학대당한 기억이 있으니까 학대를 하는가보다. 환경이 사람을 주무르는 것처럼.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나랑은 전혀 상관 없는 얘기라고 생각하면서.

  그런 생각이 후회스러워진 것은 교복을 더 이상 입지 않아도 되는 나이가 되었을 때였다. 버라이어티하지만 초라한 서로의 가정사를 공유하던 자리에서 친구는 그런 말을 했다.

  "그거 알아? 나는 지금까지 주먹질 한 번 해본 적이 없다?"

  부모님 두 분이 사이비에 깊게 몸담그고 계신 건 알았지만 상습적인 폭력이 있는 줄은 몰랐다. 순식간에 가슴이 차가워졌지만 내색하지 않는 나의 앞에서 친구는 오래 묵혔던 마음을 토해냈다. 주먹이, 술병이, 탁상 옆에 있던 시계가 날아왔던 시간들을 떠올릴 때마다 친구는 자기연민보다는 더 결연해져서는, 눈까지 빛내가며 얘기하는 것이다. 저는 타인에게 꼬집는 상해조차 입혀본 적이 없다고, 모진 말 비슷한 것도 하지 않으려 노력했으며, 타인이 저를 그렇게 대해도 항상 참아냈다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한 평생 피해자로만 살아갈 것임을 엄숙하게 맹세하는 친구 앞에서 나는 고개를 떨궜다. 머리가 띵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게임을 하는 중 저주라는 말에 눈이 오래 머물었다. 꼬맹이 시절 때 봤던 광고가 얼마나 폭력적인 것이었는지 그제야 깨닫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꽤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그 때의 공익광고처럼 피해자들에게 삿대질을 한다. 쟤가 잘못커서 저렇다, 하고. 보통 사람이 그랬으면 폭력적 행보로 끝났을 일은 그들이 하는 순간 유전자를 타고 내려오는 저주가 된다. 단지 누군가의 자식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이 게임의 주인공도 비슷한 현상에 시달린다. 가족을 버리고 떠나버린 아버지와 오로지 감당해야만 했던 어머니, 그리고 각자의 방식으로 인생을 견뎌내었던 그 기억은 불행한 추억으로 남기보다는 다시금 그의 인생에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든다. 여전히 그와 그녀의 아들이기 때문에 느낄 수 밖에 없는 죄책감, 또 누군가의 그림자를 뒤따를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그 시대를 버텨냈다는 기이한 자부심이 자리한 채 맞이한 장례식은 무뎌졌던 마음을 날카롭게 한다. 어긋남은 충분히 예측되었지만 여전히 '나'를 비참하게 하고 서로는 서로가 의뭉스럽지만 그것을 따져묻지는 않는다. 지쳐서, 이제껏 참아왔던 모든 게 무너질 것 같아서. 이유가 중요한 시기는 너무 지나버려서.

  가난 콤플렉스, 무책임으로 뒤섞여 게임 내내 구역질나게 묘사되던 아버지. 그에게 전화를 걸 때 나는 기어코 이 게임에 몰입하고 말았다. '일종의 인류애 정도랄까' (I was only doing what's right. What anyone would do.) 영어로는 두 문장. 한국어로는 간결하기만한 한 문장에서 세월이 느껴져서.

  자식은 부모가 자신의 오롯한 바다가 아님을 알게되는 순간이 온다. 지겹게 증오하고 사랑하고 매달리다 지치기도 하고 나면 어느 순간 그랬냐는 듯 태연해지는 것이다. 그 때가 바로 우리가 최초의 타인이 되고, '가족애'가 아닌 '인류애'를 운운할 수 있는 순간이다.

  어쩌면 마지막에 주인공이 웃으며 눈 감을 수 있었던 것은 지난 인생을 한 번 회고해보았기 때문이 아닐까. 어머니와 아버지 사이에서 끊임없이 죄책감을 느껴야했던 자신을 물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을 걱정하며 임종 순간에 손잡아주는 아내가 있기 때문에, 일기장의 거짓말을 살아있을 때 읽어주는 가족이 있기 때문에, 그것은 오롯이 지켜낸 그의 세상이고 그는 그 안에서 나름 편안히 잠들 수 있었다. 나는 단언한다. 그는 저주에 걸리지 않았으며 한 평생 그것을 두려워하며 살았지만 결코 역사를 반복하지 않았다고. 또, 그 자신도 그 사실을 전부 깨달았을 것이라고.

  그리고... 아버지. 바다는 파도를 떠올려도 파도는 바다를 잊을 수 있더라고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새까맣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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