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너를 위해서 헤어지는 것이 아니다.
내가 성폭행 때문에 힘들어서 헤어지는 것도 아니다.
결국 답은 나와 있었다.
나는 너에게 화가 났다.
그리고 너에게 상처받았다.
나를 존중하지 않은 너에게.
나의 첫 경험을 망치고
피임을 제대로 하지 않아 나를 불안하게 만든 너에게
화가 났고
너에 대한 신뢰가 깨졌다.
그래서 나는 너와 지내는 게 힘이 드는 거야.
너를 믿을 수가 없고
너한테 상처를 받았으니까.
그래서 불편했던 걸
나는 또 나의 잘못인 마냥
내 과거에서 비롯된 일인 것마냥
그렇게 스스로를 자책하고 괴로워했던 거야.
내 잘못이 아니야.
네가 나한테 잘못한 거야.
그래서 나는 화났어.
많이 많이 화났어.
너는 내 안에 사정을 해서 내가 사후 피임약을 먹게 하고도
그런 나를 두고 수영장에 가서 놀지 않았니.
그리고도 그 다음에도 또 콘돔을 가지고 오지 않았어.
가지고 오지 않아놓고도 하려고 했어.
그런 분위기를 다 만들어놓고는 안 가지고 왔다고 이야기했잖아.
결국은 내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들었다는 얘기야.
결국 그 다음엔 내가 한 달 동안 경구 피임약을 먹어야만 했어.
내가 지금까지 너에게 이야기를 못했던 건
내가 한 번도 단호하게 '싫다'고 이야기하지 못했기 때문이야.
그래서 나는 죄책감이 들었어.
내가 거절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물론 내가 거절했어야 하는 것도 맞지.
하지만 나는 남자와의 성관계가 처음이었고 그런 점에서 오빠를 믿었었어.
그래서 오빠에게 나를 맡겼었는데,
나의 판단 착오였나봐.
오빠는 믿을만한 사람이 아니었어.
그래서 나는 오빠를 믿을 수 없었어.
오빠랑 지내기가 불편했고.
나중에는 나까지도 믿을 수가 없어서
오빠와의 스킨쉽을 피하게 되더라.
아예 섹스를 할 분위기를 만들지 않으려고.
그러다보니까 점점 더 멀어지고 불편한 점만 쌓이게 되었어.
그랬던 것 같아.
이것 저것 불편한 점, 불만인 점만 눈에 들어왔어.
근데 나는 이유를 다른 데서만 찾고 있어서
답이 안 보였던 거야.
자꾸 내 잘못이라고 생각했어.
내가 부족해서, 내가 못 나서, 내가 힘들어서
지금 우리가 이렇게 삐걱거리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에
자꾸만 내가 더 잘하려 하고, 나만 질책하다보니까 더 힘들었어.
그런데 아닌 것 같아.
지나고 보니까 이제 좀 선명하게 보인다.
나는 오빠에게 화가 나 있던 거야.
그래서 오빠에게 모나게 굴 수밖에 없었고
자꾸만 오빠의 마음을 확인하고 싶었고
오빠가 아주 조금만 변한 모습을 보여도 나를 막 대하는 것 같은 느낌에
견딜 수가 없었어.
나는 오빠에게 상처 입었던 거야.
.
.
그래서 힘들었었구나.
나는 내가 일 하는 게 힘들어서,
가족 일 때문에 힘들어서, 내 일 때문에 힘들어서
오빠와의 관계도 힘든 줄 알고
자꾸 그런 얘기만 했지.
그러면 풀릴 줄 알았지.
그런데 안 풀리던 이유를 이제 알겠다.
그게 문제가 아니었어.
이미 6개월 전에 '헤어질까'라는 고민을 시작했는데
그 문제에 대해서는 생각하지도 않고 지냈으니
문제가 풀릴 리가 없지.
그래,
나는 7월 18일,
우리가 사귄 지 12일 째 되던 날
그 날부터 헤어짐을 고민했어.
그 날 오빠에 대한 신뢰가 깨졌고.
그로부터 한 달 뒤에는
아예
신뢰가
박살
났지.
제대로 될 리가 없지.
잘 지낼 수 있을 리가 없지.
믿을 수 있을 리가 없지.
내 쪽의 문제가 아니었어.
나는 또 내 문젠 줄 알았지.
내가 평소에 사람을 잘 못 믿으니 오빠를 잘 못 믿나보다.
내가 평소에 좀 어두우니까 지금 이렇게 기분이 안 좋은가보다.
내가 평소에 좀 힘드니까 오빠랑도 힘드나보다,
다 그렇게만 생각했지.
그래서 점점 더 자신감도 없어지고 미안함만 늘어가고
오빠한테 바라고 요구하지도 못하게 되면서
많이 힘들었던 것 같아.
사실 내 잘못인 게 아니었는데.
난 그냥 오빠한테 화가 나 있었고 상처받은 거였는데.
이제 알아버렸어, 그걸.
그리고 오빠도 몰랐고.
미안하지만 내가 그 때 당시에 너무 힘들어서
친구들한테 좀 털어놨었거든.
믿을 만한 애들이고 오빠를 욕한 것도 아니야.
그냥 내가 힘들어서 있었던 일 털어놓고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고민 상담했었어.
그랬더니 다들 그러더라.
지금 당장 헤어지든지 아니면 속 시원히 얘기하고
가라고.
안 그러면 나중에 너 이것 때문에 헤어지게 된다고.
그 말 안 들었지.
당장 헤어질 생각도 없었고
다 이야기할 용기도 없었고.
그런데 정말 이것 때문에 헤어지게 되네.
경험자 말 틀린 거 하나 없네.
.
.
둘 중에 하나라도 조금만 더 빨리 알아차렸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지?
너무 늦어버렸다.
나는 이제 완전히 지쳐버렸어.
오빠에 대한 신뢰도 완전히 무너졌고.
이제 그만 하자.
그만 만나자.
.
.
고마웠어.
나쁘기만 했던 건 아니야.
내가 좋아했던 사람이 나를 좋아한다는 사실에
나는 정말 정말 기뻤었어.
우와 이게 정말인가,
싶었지.
오빠가 나를 좋아해줄 때
나한테 잘 해줄때
사랑한다고 얘기해줄 때
안아줄 때
뽀뽀해주고 키스해줄 때
정말 정말 좋았어.
그런 느낌은 처음이었어.
따뜻하고 부드럽고.
그런 일만 없었더라면 참 좋았을텐데
아쉽다.
한 번의 실수가 이렇게 큰 영향을 미칠 줄이야.
태국에서 정말 즐거웠는데.
좋았잖아, 우리?
같이 여행도 하고.
생각해 보면 그 때가 가장 좋았던 것 같아.
그리고 그 때까지만 좋았던 것 같아.
그 뒤로 나는 항상 힘들었어.
.
.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내 첫 남자친구야.
어쩌다 이렇게까지 돼버렸을까.
에휴
.
.
아무튼 지금이라도 알아서 다행이야.
이쯤에서 끝내자.
하나만 이야기할게.
앞으로 다른 여자를 만날 때
혹시라도 나처럼 어린 여자애를 만나게 된다거나
오빠가 처음인 사람을 또 다시 만나게 된다면
이거 하나만 기억 해둬.
여자에게 첫 경험은 굉장히 중요하다는 거.
정말 정말 큰 의미가 있다는 거.
그냥 보통 섹스가 아니라는 거.
그러니까 잘 해줘.
만약 처음이라면
그 사람이 정말 준비된 상태에서
그 사람이 편안해 하는 곳에 가서
부드럽게
사랑해주면서
그렇게 해줘.
딱 한 번이잖아.
게다가 정말 정말 아프고 불안하거든.
그러니까 만약에 또 다시 처음인 사람을 만나게 된다면
여러 번 해본 여자랑 하듯이 그렇게 하진 말아.
완전히 다르다구.
그리고 그렇게 실수를 했다면
책임 있는 행동을 보여.
사후 피임약,
가벼운 일 아니야.
특히 첫 경험에 사후 피임약은
정말로 충격적인 일이야.
그런 거에 비해 오빠의 행동은 걸맞지 않았어.
내가 병원에 혼자 가게 했잖아.
약국에도 혼자 가게 했고 약도 혼자 먹게 했잖아.
거리도 멀고 일단 급하니 나 혼자 했었어야 한다고 백번 양보해도
그 다음에라도 왔었어야지.
적어도 그렇게 친구들하고 수영장에 가진 말았어야 했어.
결국 나는 친구들을 불러서 기분을 풀어야 했고
이건 말도 안 돼는 일이었다고 생각해.
그리고
그렇게 내가 힘들어하는 걸 봤으면
다음엔 콘돔을 가져왔어야지.
내가 얼마나 실망했는 줄 아니?
차라리 처음보다도 이 때 나는 더 실망했어.
사람이 한 번 실수를 할 수는 있지만
그게 반복되면 그건 실수가 아니라 성의가 없는 거거든.
오빠는 그런 의미에서 내게 성의가 없었던 거야.
나를 존중하지 않은 거야.
내가 힘들어 했던 거, 내가 사후 피임약을 먹게 한 거
다 가볍게 생각한 거 밖에 안 돼.
그렇다고 오빠가 그 다음부터 나한테 관심을 가졌냐,
그것도 아니었지.
한 번도 몸은 어떠니, 생리는 하니,
물어봐 주지 않았어.
그런 걸 물어보는 게 민망했더라도
내 상처와 불안함이 그 민망함의 크기를 훨씬 넘어섰기 때문에
오빠는 노력했었어야 했어.
하지만 오빠는 그러지 않았어.
임신 테스트를 할 때도 나는 언제나 혼자였지.
그래서 결국 나는
100일 여행 한 달 전에 산부인과에 가서 경구 피임약을 타서
한 달 동안 먹었어.
그렇지 않고는 여행을 갈 수 없었거든, 불안해서.
오빠가 또 안에다 해버릴까봐.
물론 오빠는 이 때 콘돔을 가져오기는 했지만,
나한테 이렇게 얘기했지.
'이거 가져와야 네가 기분 안 나빠하니까 가져왔어.'
미친,
콘돔은 당연한 건데
내가 불안해해서 가져왔니?
내가 안 불안해 하면 안 낄 거니?
내가 무슨 콘돔에 목 매다는 여자니?
게다가 나는 네 이 말이 귓가에 멤돌아.
내가 콘돔이 없어 불안하다고 하자
'생리 안 하면 괜찮잖아'
라고 했던 네 말.
도대체 어디서 나온 말이니.
생리를 안 하면 더 위험한 거 모르니.
어떻게 이렇게 무지할 수가 있니.
나는 첫 상대로 이렇게 무지한 사람을 택할 순 없어.
나도 처음인데 너까지 무지하면 어쩌자는 거야.
그래서 내가 불안해하면
너는 공부하려는 노력이라도 보였어야 했어.
하지만 나는 전혀 그걸 느끼지 못했어.
.
.
생각해보면 이 때의 피해의식이 나를 자꾸 괴롭혔던 것 같아.
나는 그냥 내가 다 힘들고 우울해서 그런 건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네가 나 힘든 거 몰라줄 때,
그 때마다 내가 힘들었던 건
네가 정말 내가 힘들 때 옆에 있어주지 않았던 게 기억에 남아서
그랬던 것 같아.
네가 자꾸만 나와의 약속을 어기고
나한테 무관심해 보이던 거에 화가 났던 것도
내가 피임과 임신 때문에 불안할 때 네가 나를 혼자 두고 무관심했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아.
응응 그랬어.
그랬던 거였어.
다른 이유가 아니었어.
.
.
네가 잘못했어.
네가 나빴어.
너 미워.
나 너한테 화났어.
사과해, 나한테.
미안하다고.
잘못했다고.
.
.
어쩜 나한테 이러니.
처음인데.
난 모든 게 처음이었는데.
내 처음을 이렇게 만드는 구나.
내가 사람을 잘못 본거니?
난 네가 참 듬직해서 좋았어.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너에게 나를 맡겼던 거야.
내 잘못이었어.
너를 믿어서는 안 됐었는데.
네가 다 알아서 해주겠지,
오빠가 괜찮다면 괜찮은 거겠지,
이런 개뿔.
하나도 괜찮지 않았고
오빠는 아무것도 몰랐어.
결국은 내 믿음이 내 발등을 찍어버렸어.
.
.
그만 하자.
더 이상 믿음도 없고
조율할 힘도 없다.
애초에 신뢰가 기초가 되지 못한 관계가
매끄러울 수가 없었어.
내가 왜 그토록 오빠가 껄끄럽고 불편했는지
이제야 조금은 알 것 같다.
내 일상이 힘들어서 오빠와의 관계가 힘들었던 게 아니라
오빠와의 관계가 힘들어서
일상이 힘들었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소름 끼치네.
완전히 뒤집어 생각하고 있었어.
오빠랑 더 같이 있는 게 힘이 든다, 솔직히 말하면.
그거 아니?
내 가방 속에 아직도 내가 먹었던 사후 피임약 포장지와
임신 테스트기가 고스란히 들어 있는 거.
도저히 못 버리겠더라.
그거 아니?
약국에 어린 여자애들이 피임약을 타러 올 때마다 그 때 생각이 나는 거.
걔네가 남자친구랑 같이 오기라도 하면 나는 접수하다가 목이 메는 거.
나는 너랑은 이렇게 만날 수가 없다.
그만 하자.
더 이상 상처받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