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동생이 하도 들어보라고 성화를 부리길래
팟캐스트를 듣고 있는데
오랜만에 연애와 관련된 생각을 하게 된다.
자연스럽게 전에 했던 연애들을 떠올려보는데,
전 남자친구가 상상 속에서 나에게 묻는다.
"너는 왜 나한테 화를 안 내?"
그리고 나는 대답한다.
"나를 성폭행한 사람한테도 화를 안 내는데
전 여자친구 좀 만났다고 너한테 화를 내겠니,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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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늘 나를 답답해한다.
너는 왜 화를 못 내냐고.
나는 냈다고,
대답해도
이게 화를 낸 거냐고 아우성.
너무 친절하단다.
이 정도는 화를 내는 게 아니라고.
급기야 자신을 따라해보라고,
화는 이렇게 내는 거라고.
나는 따라해보려고 노력하지만
화가 안 난 건지
화를 못 내는 건지
아무튼 그렇게는 못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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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럴까,
침대에 누워 라디오를 들으면서 생각해보기를,
화를 내는 기준이 다를 거라는 생각이 든다.
화가 나는 기준은 비슷하다.
그 화를 처리하는 방식의 차이.
여러분은 남자친구가 전 여자친구를 만나면
바로 화를 내는 방식으로 사고와 행동이 돌아가는 지 모르겠지만,
나는 조금 다르다.
아마 나는 그 사람이
어린 아이를 성폭행했다고 해야
상욕을 하며 화를 내겠지.
전 여자친구를 만나건
만나서 잠을 자건
나로서는 그다지 심각한 일은 아니다.
배신감을 느끼고
짜증도 나고 화도 나지만
결국은 그 사람도 사람.
전 여자친구에게 흔들리는 것 정도야.
세상에는 자기 딸을 성폭행 해놓고도
잘 사는 사람도 얼마든지 있는데.
그 사람을 이해하는 법을 배우면
세상에 이해 못 할 사람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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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구태여 이 글을 쓰는 이유는
그 이해가 과연
나를 위한 이해인지
아니면 합리화인지
아직 판단이 잘 서지 않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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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화 좀 잘 내고 살려면
아빠를 찾아가서 화를 내야겠다는 확신이 든다.
복수를 하고 싶은 마음도 있고.
어떻게 하면 엿을 먹일 수 있을까.
하지만 이내 곧 생각을 달리한다.
어떤 사람에게 욕을 하기 위해서는
나 또한 그만큼의 욕을 먹을 준비를 해야 한다.
어떤 사람을 불행하게 하기 위해서는
나 또한 그 사람에 의해 그만큼 불행해질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어떤 사람이 가진 것을 잃게 만들고 싶다면
나 역시 그 사람에 의해 내가 가진 소중한 것들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나는 그 사람 입에서 나오는 상스러운 욕들을 듣고 싶지도 않고
불행해지고 싶지도 않고
지금 이 자리에서 내가 갖고 있는 소중한 것들을 잃고 싶지도 않다.
내 사람들,
내 시간들.
그렇다면
나는 누구에게 욕을 할 자격이 없으며
누군가를 불행하게 만들 자격도
누군가가 가진 것들을 잃게 만들 수 있는 자격도 없다.
왜냐하면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지키고 싶은 것이 있는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방어적인 사람이다.
누군가가 자신을 공격한다면
그 사람은 가장 강할 수도 있겠지만
내가 먼저 공격하려거든
가장 약한 사람이
바로 지켜야 할 것들이 있는 사람이다.
지금으로서는
나는 지키고 싶은 것이 많다.
잃고 싶지 않은 것이 많다.
그렇기 때문에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내가 가진 것들보다
그에게 화를 냄으로써
내가 얻을 것들이 더 소중하고 중요하다는 확신,
그리고 그로부터 오는
용기가 생긴다면
그 때서야 나는
그에게 화를 낼 수 있을 것이다.
지금으로서
나는
현실에 안주하고 있는 것이다.
왜 그에게 보란듯이 화를 못낼까
고민할 필요도 없다.
답은 자명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