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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하나
 물고기와 물   trois.
조회: 3007 , 2013-12-26 14:10



여기는 경찰서 휴게실이다.
참고인 조사를 하는데 동행을 해서,
조사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중이다.

기분은 그저 그렇다.
무지 좋은 상태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움푹 들어간 상태도 아닌,
그저 그런 평상시의 상태.

눈이 펑펑 내리더니,
이제는 좀 그쳤다.

.
.


나를 둘러싼 많은 상황들이
베일을 벗기 시작한 지,
이제 열흘이 지났다.

영원히 묻혀 있을 것만 같았던 '성폭력'이라는 주제가
우리 집안의 수면에 다시 떠올랐으며,
나아가 외부에도 공개 되었다.

나는 엄마에게 아빠를 고소하겠다고 말했고,
엄마는 자신은 하기 싫다고 대답했다.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고소를 진행했고,
진술을 했다.

엄마를 설득하려 했으나,
엄마는 내 말을 듣지 않았고,
증언을 하러 나오라는 형사의 전화도 받지 않았다.

나에게는
'너는 네 생각밖에 안 하는구나'
'엄마는 지금 만사가 귀찮아서 아무것도 하기 싫어.
그러니까 하고 싶으면 집에서 나가서 해.'
'너도 엄마 이혼했을 때 모른 척 했잖아.'
'아빠가 불쌍하기도 해. 그래도 네 아빤데.'
'엄마는 내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들어. 다른 데 신경 쓸 여유가 없어.'
'잊어, 제발, 부탁이야. 다 잊고 살자.'

등등의 말을 하며
수사에 협조하기를 거부했다.

심지어 얼마 전에는
나에게 말도 하지 않고,
나를 가해자이자, 피고소인인 아빠에게로 데려갔다.
의도야 어찌되었든,
내 의사는 묻지도 않은 채,
버스도 잘 다니지 않는 그곳으로
피고소인과 고소인을 만나게 하는 자리를 마련했다는 것만으로도
엄마가 얼마나 지금 이 상황에 대해서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지를
여실히 알 수 있었다.

엄마와 나는,
지금 다른 우주에 속해 있는 듯 하다.
엄마는 아직, 내가 떠나온 그 우주 안에 있다.
15년 동안 계속된 친족 성폭력의 굴레 안에,
그 안에 계속 머물러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갑자기 그 굴레에서 벗어난 나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내가 왜 그 굴레에서 벗어나려 하는지,
들어도 들어도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
.


처음엔 답답했다.
미웠다.
절망스러웠다.

배신감이 들었고,
엄마를 잃은 기분이었다.
어떻게 하면 나를 이해시킬 수 있을까,
고민해보았지만
대화를 통해 엄마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이게 '마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기 때문이다.
이건 어쩌면

'인지'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는 생각이 들었다.

현상과 상황을,
바로 보고 있지 못한 것이다, 엄마는.
내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를 성폭행한 아빠가 불쌍하다는 생각에 고소를 하지 못했듯,
엄마도 지금 그 상태인 것이다.

그 때의 내가,
아무리 상담사 선생님이
'아무리 불쌍해도 아빠는 가해자다. 아빠가 잘못한 거다.
나는 고소할 권리가 충분히 있다.'
라고 말씀해주셔도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엄마는 지금
왜곡된 인지의 굴레 속에서
계속해서 돌아가고 있는 중인 것이다.

지금은 내가 아무리 바깥에서 진실을 외쳐대봤자,
엄마의 싸이클을 뚫고 들어갈 수는 없다.
이 싸이클을 풀 수 있는 사람은
엄마밖에 없는 것이다.


.
.


아빠나 엄마는,
'악의'에 가득차 있다,
라고 보기보다는,


잔뜩 왜곡된 인지에 갇혀 있다,
라고 보는 것이 훨씬 더 현실적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방식으로 잔뜩 왜곡된 인지-'
로 인해 유발되는 행동과, 그로 인한 피해가 바로
악(惡), 이라고 명명되는 것일 테지만,

어쨌든 단순히 '나빠!'라고 소리를 지르며
'도대체 왜 저런 행동을 하는 거지?'라고 묻는 것보다는,
왜곡된 인지 속에 갇혀 있다고 설명하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실마리가 되어줄 것 같다.


그리고 이 사실이 나에게 알려주는 한 가지는,
저 둘은 이미 나의 영역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엄마를 바꿀 수도,
아빠를 바꿀 수도 없다.
그저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일 뿐이다.


자기 자신이 뭔가 잘못됐다고 인지할 수도 있고,
인지조차 못 할 수도 있지만,
그 둘은 자기 자신을 컨트롤하지 못하는 사람들인 것이다.
자기 안의 왜곡된 인지에 이끌려,
상황 판단을 명료하게 하지 못하는 상태.

바깥에서 보면 절대로 상식적이지 않은 말과 행동을 보이고 있지만,
정작 자신은 그것에 대해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상태인 것이다.



.
.

그런 사람이 그 왜곡된 인지에 대해서 깨닫거나,
벗어나기 위해서는,

새로운 자극이 필요하다.
살아왔던 대로 살아와서는,
뱅글뱅글 돌아가던 싸이클을 바꿀 방법은 없다.

어떤 결정적인 계기가 필요하다.
늘 보던 나, 늘 내가 하던 말이 아니라,
제 3자의 시선이나 반응,
새로운 상황,

지금까지 속해 있고, 돌아가던 일상의 싸이클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나는 고소가 그런 계기가 되어주기를 바라고,
형사의 개입이 그 촉진제가 되어주기를 바라며,
법적인 처벌이 그 결정적인 계기가 되어주기를 바란다.


일상 속에 숨어 숨쉬던 성폭력이라는 일이,
숨겨두고 살면 그냥저냥인 그런 일이 아니라,
중형을 선고 받을 정도로 심각하고 무거운 일이며,
나에게 그마만큼의 상처를 주었다는 것을



문득이라도,
깨닫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친족성폭력이라는 물 속에서 헤엄치던 우리 가족이라는 물고기가,
이제 그 물에서 벗어나,
그 물을 인식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정은빈   13.12.26

하나씨의 어떤 역경에도 흔들리지 않는모습...항상 그모습이 보고싶어서 일기를 기다리게되는것같아요 정말 이번연말에는 하나씨가 원하시는대로 이루어지길 기도할께요~~^^

프러시안블루   13.12.26

응원합니다

새해   14.01.01

무기력함에 매몰되지 않고 자존감을 찾아가는 하나씨의 모습에 감동을 받습니다. 똑같은 상황은 아니지만, 우리집이 처한 상황에 접목시켜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나씨에게 감사하며, 아직은 휘청거리는다리지만 자존감을 갖고 똑바로 서서 걸어가는 하나씨에게 박수를 보냅니다.

옹이   15.05.03

안녕하셨어요? 벌써 2015년 입니다. 오랜만에 들어왔지만 역시 울다를 지키고 계시네요^^ 저를 모르시겠지만 하나님의 글을 읽으며 속으로나마 응원했던 사람입니다. 이 글이 참 마음에 와닿아요. '왜곡된 인지의 굴레'라는 말이요.... 항상 느끼지만 참 멋진 분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