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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하나
 아이쇼핑은 이제 끝났다.   six/sept.
조회: 2749 , 2016-01-25 02:58


나는 물건을 살 때 굉장히 오래 걸리는 편이다.
내가 수집할 수 있는 데이터를 모두 수집한 다음,
현장 실사를 하고 난 후에야
물건을 산다.

가령,
공장에서 신을 털실내화를 사야한다면
나는 일단 인터넷을 뒤져서 시중에 판매되고 있는 모든 실내화를 검색한다.
가격과 디자인, 질을 모두 비교해서 
구매 후보를 선정한다.

그 후 내가 갈 수 있는 판매처들을 방문한다.
가까운 시장이나 마트,
다이소 등을 모두 돌면서
혹시라도 인터넷에 없는 상품들이 있는 지 체크한 후에,
그 중에서 가장 괜찮은 한 물건을 골라서 산다.

매우 많은 에너지와 시간이 들기 때문에
사실 물건을 사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나는 혹여라도 마음에 들지 않는 물건을 이용하면서 느끼는
불만족스러움이 정말 찝찝하기 때문에
최대한 모든 상품들을 점검한 후에 구매를 하는 것이다.


.
.

그런데 이번에 털실내화를 살 때는
아는 언니와 함께 쇼핑을 했다.
같이 밥을 먹고 차를 마신 후
시장에 들렀는데
사실 털실내화를 파는 곳이 몇 곳 없었다.
그래서 그냥 두 번째로 들른 가게에 있는
세 가지 실내화 중 한 가지를 샀다.

평소 같았다면 그 시장을 전부 돌아서 
그 시장에서 파는 실내화를 모두 본 다음에
마음에 드는 게 있으면 구매했을 것이다.

그런데 언니랑 함께 와서 그럴 수도 없었고,
일부러 같이 와줬는데 아무것도 안 사가는 건 뭔가 미안해서
그냥 그나마 괜찮은 실내화를 샀다.

사실 마음에 쏙 들지는 않았는데
신고 다니다보니 그냥 신을만 했다.
내가 걱정했던 것 만큼,
'마음에 쏙 들지 않는 물건을 산 것'은 
큰 일이 아니었다.



.
.

내가 앞으로 무엇을 하며 살 지를 선택하는 데에도
나는 같은 태도를 취해왔다.

아직은 결정할 수 없어,
나는 경험이 적으니까.
최대한 많은 것들을 경험해보고 난 다음에 
내가 무엇을 하면서 살 지 결정할 거야.

이 나라, 저 나라를 가보고
이 알바, 저 알바를 해보고.
그래서 후보를 추리고 비교하고.

음, 성폭력 상담사가 괜찮고
대안학교 선생님도 괜찮은 것 같고
심리 상담사도 좀 괜찮은 것 같아.

그런데 좀 더 살다 보면
좀 더 돌아다니다보면 더 괜찮은 게 나올 수도 있으니까
아직 정하지는 말자.

그렇게 지금까지 왔다.

하지만 이제는 아이 쇼핑은 끝낼 때가 온 것 같다.
내가 지구상의 모든 직업과 삶을 다 본 다음에 내 진로를 결정할 수는 없다.
그러기 전에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찾지 못했다고 할 수도 없다.

사실 나는
내가 내 진로를 정했는데
내가 우연히라도 그것보다 더 나은 것을 발견했을 경우
아, 좀만 더 살아보고 결정할 걸,
이라는 후회를 할까봐 두려운 것이다.

내가 이 털실내화를 사서 신고 다니는데
혹시라도 더 예쁜 실내화를 발견하면 어떡하지?

아직 사지 말아야겠다.

그러는 사이에 겨울은 가고
나는 발이 시렵다.
결국 나는 올해도 털실내화를 사지 못 한다.



.
.


그냥 하나 사서 신으면 된다.
지나가다 더 예쁜 것을 발견하면,
또 사든,
아니면 내 실내화에 정이 들었으면 그냥 신고 다니든,
하면 된다.

그냥 지금 하고 싶은 것 하나 하면 된다.
살다가 더 좋은 것을 발견하면
그것을 하든,
아니면 하던 것이 그래도 좋으면 그냥 계속 하든,
하면 된다.

이제는 그럴 때가 되었다.
이쯤 되었으면
이쯤 살았으면
그럴 때도 되었다.

충분히 경험했고
충분히 생각했다.

이제 정보 수집은 그만.
아이쇼핑은 끝이다.
지금껏 내가 봐왔던 세상,
내가 해왔던 것들을 토대로
내 다음 행보를 정해보자.

그러면 된다.

4:00   16.01.25

wow!!응원합니다^^

ssoy   16.05.24

ㅎㅎ 아.. 비슷한 경험이라 뒤늦게 댓글답니다..저도 뭐하나 사면 찜 리스트를 쌓아놓는 타입이예요..그게 없어진게 직장다니면서예요.. 결국 시간단위로 돈을 버는거잖아요.. 제가 물건을 사는데 쓰는 시간이 돈으로 계산되면서.. 실패의 비용이 고민하는 비용...즉 시간이나 타이밍의 가치보다 싸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뒤라 그냥 적당히 삽니다. 특히 옷이나 화장품은 유행을 타는거잖아요..적당히 사면서 시간과 마음의 평온을 찾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