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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하나
 모질지 못한 - 스스로를 지키기   deux.
조회: 2931 , 2012-07-27 00:19



나는 모질지를 못하다.

아버지가 대학 등록금을 나몰라라 하고 있는데도
전화해서 화 한 번 내지 못한다.

남자친구가 첫 관계 때 콘돔을 사용하지 않았는데도
섭섭하다, 실망이다 말 한 마디 하지 못한다.

엄마가 용돈 한 번 주지 않으면서 가끔씩 돈을 타가는 것 가지고
뭐라고 할 때도, 변변한 대꾸 한 마디 하지 못한다.



.
.



어째서
나는 항상
타인이 겪을 고통을 
스스로 먼저 겪고 미루어 짐작하면서
나의 고통보다
타인의 고통을 먼저 신경쓰는 걸까.


'내가 이렇게 말하면 저 사람은 이런 걸 느낄 거야.
그러면 저 사람은 마음이 아플 거야.
마음이 아프면 안 돼.
그러니까 말을 하지 말아야지.'




'내가 남자친구에게 섭섭하다거나 실망이라고 이야기하면
남자친구는 상처를 받을 거야.
오빠가 상처받는 건 싫어.
그러니까 그냥 내가 상처받고 말래.'


'생전 아버지에게 안부 전화 한 번 안 하면서
돈 문제로 전화를 걸면 아버지는 자신이 자식에게 돈 뿐인 존재라고 느끼고
씁쓸하고 비참해질 거야.'


'엄마에게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감정 조절이 안 돼서
더 상처주는 말까지 튀어나올 것 같아.
그러기는 싫어. 
그러니까 그냥 애초에 아무 말도 하지 말자.'




.
.



대단한 천사 나셨다.



불편하다.
일의 결과가 참담할 것이라 미루어 짐작하고
최대한 스스로를 상처 입혀
다른 사람의 상처를 최소화하려 한다.



왜?
조금 씁쓸하고 비참하면 어때서.
조금 상처 받으면 어때서?

내가 상처받는 거
내가 슬픈 거
내가 힘든 건 

왜 

괜찮고

상대방의 마음이
다치는 건
그렇게 무서워하는데?




.
.



어쩌면
내가 너무나 큰 상처를 받아서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너무나 아팠기 때문에
내가 
너무나 괴로웠기 ‹š문에
그리고
나를 그렇게 만든 사람을
내가 그토록이나 원망했기 ‹š문에


다른 사람을 상처주는 일을
하고 싶지 않은 것일 수도.
누군가에게 그런 원망을 받는 게
싫은 것일 수도 
있다.



.
.



내 마음이 괴로우면
내가 이렇게 괴로운데
저 사람 마음이 괴로우면
저 사람이 얼마나 괴로울까.




.
.




어쩌면
싸우는 것이 싫은 것일 수도 있다.

내가 
선제 공격을 했을 때
돌아올
반격으로 인한 그 상처가
두려운 것일 수도.



사람은 저마다
스스로를 방어하려는 본능이 있다.
내가 어떤 이유로든
누군가를 공격한다면
반드시 같은 크기의,
혹은 그보다 더 큰 반격이 돌아온다,

라는 생각.


아주 어렸을 때
느낀 것이고
가지게 된 것이다.


상대의 잘못이 아무리 명백하더라도.
내가 아무리 결백하고 옳다고 하더라도.
내가 반드시 이기는 것은 아님을.
오히려 내가 더 큰 상처를 입을 수도 있음을.
내가 질 수도 있음을,



나는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수도 없이 겪었다.


아버지는 늘 나를 성폭행했고
폭행했고
나를 유린했지만
늘 유리한 것은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집안에서 가장 큰 권위를 가지고 있었고
아무리 잘못을 해도 아버지는 늘 당당했고
그 권위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늘 
그가 
이겼다.



.
.



표현해봤자
질 거라는 생각.
나만 상처입을 거라는 생각.



그 어떤 정당한 이유로든
타인에게 날을 들이대야 하는 때가 오면
나는 아주 가까운 거리의 벽에다 대고
총을 쏴야 하는 기분이다.
철판에 레이저를 쏴야만 하는 기분.


다시 튕겨져나와 나에게로 돌아올 것임이
분명한
그 일격.



그래서 차라리 나는
쏘지 않는다.



.
.




한 가지 더 있다면,
나의 표현의 대가는 항상
묵직
했다.

아버지가 나에게 성관계를 요구했을 때
내가
'싫다'
고 대답하면
방 안의 공기는 납덩이처럼 가라앉았고
나는 아버지의 누렇게 뜨고 빨갛게 충혈된 눈동자를 
바라보면서
다시 대답해야만 했다.

다시 납덩이를 견디고
'싫어'
라고 대답하면
아버지의 주먹으로
내 골이 울렸다.

입이 다물어지고
울음이 터지면
이미 끝난 일이었다.


내 표현의 대가는
이랬다.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
내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내가 싫은 것을 표현하면
집안의 분위기는 가라앉았고
아버지는 권위로 나를 내리 눌렀다.

나의 표현의 대가는
납덩이 같았다.



그래서 나는 그냥
편하게
입을 다물었다.
참 
편했다.



.
.





이런 일련의 모든 것들이 엮여
나는 지금 
'회피의 여왕'
이 되어 있다.


성가신 모든 일은 회피한다.
심지어 설거지조차도 회피한다.
어쨌든 성가시니까.

앞으로 콘돔을 사용해줄 것을 요구하지도 못하며
학교 좀 다니게 등록금을 지원해줄 것을 요구하지도 못하며
용돈을 요구하지도 못한다.


내가 요구했을 때
상대방이 받을 상처를 염려하고
상대방의 반격을 걱정하고
결국은
그로 인해 상처 입을 나의 마음을 걱정해서


결국 나는
그냥
스스로
할복하고 
입술을 깨물고 만다.



.
.



이젠 좀 달라지고 싶다.
조금 모질어지고 싶다.





-



상황의 파악
해야할 일을 깨달음
결과에 대한 두려움을 느낌
회피- 스스로가 손해를 보며 견딤



지금까지는
나의 이런 회피가
상대방에게 손해를 끼친 적은 없었다.
늘 내가 손해를 보고 끝났다.

특히 아버지의 경우
나는 그의 많은 잘못을 눈감아 주었으며
그는 많은 덕을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연애를 시작하니
그렇지가 못했다.


내가 회피하고
내가 스스로를 상처 입힘을 통해
동시에
상대가 상처를 받을 위험에 처한다.

내가 
첫 경험에 대한 문제를 회피하고
마음 속에 쌓아두면
나 혼자 불편한 것이 아니라
나의 불편함을 상대도 느낄 것이고,

내가 성관계를 껄끄러워 하게 됨으로써
상대방이 그로 인해 상처를 받을 수도 있다.



나의 회피의 결과가
결국은 나를 상처입힘으로써 아무도 상처입히지 않고
나 스스로가 더 큰 상처를 입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니라


나의 회피의 결과가
스스로를 상처입히는 것도 모자라
상대방조차도 상처입힐 수 있게 되는 것이
연애라는 것이다.



.
.



결국
이제 회피는 최선이 아니다.




그렇다고 이런 마음가짐으로
회피를 치료하고자 해도 안 될 것이다.



.
.




결국 내가 해야하는 것은
만약 내가 상처를 받았다면
다른 사람에게 나의 상처에 대해서 알리고
사과를 요구하고
사과하지 않는다면
그에게도 어느 정도 상처를 입힐 수 있게 되는 것.
그럼으로써 스스로를 지킬 수 있게 되는 것.



그리고 그것이
결코 타인을 괴롭게만 하는 것이 아님을
그리고 그 괴로움이
그가 견딜 수 없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나는 한 번 그를 괴롭게 할 뿐이지만
나는 모든 사람에게 고통을 받으며 살고 있다는 것을.
이제는 스스로를 돌봐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
.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쏠 것은 총도 레이저도 아니고
내가 쏠 곳은 
벽도 철판도 아니다.

내가 쏠 것은
그냥 '말'이고
내가 쏠 곳은
'사람'이다.


내가 느끼는 것만큼
강력하지도 않고
내가 느끼는 것만큼
나보다 강하지도 않다.


그냥
사람에게
말을 할 뿐.



그러니까 
돌아올 것도
딱 그만큼의
'말'일 뿐.



나는 견딜 수 있어.
그렇게 상처받지는 않을 거야.
괜찮아.



그건 생각보다 그렇게 큰 괴로움은 아닐 거야.
그냥 사람이 나에게 하는 말인 걸.
괜찮아.




-


작은 것부터 하나씩 이야기해보자.
회피하고 눈 감기 전에
내 의사를 표현하는 연습을 해보자.


어떤 일이 있을 때마다 유념하자.


' 그냥 사람이 나한테 하는 말일 뿐이야.
견딜 수 있어. 그렇게 크게 괴롭지는 않을 거야. '



라고.



기쁘미   12.07.27

제가 요근래 느낀건데요.. 그동안 저도 상대방에게 100% 착하게만 해주려고했는데
제자신만 썪을뿐 행복하게 살수가 없더라구여, 근데 어떤친구를보니 이건 안된다고 자신이 시러하는건 딱 못박아두는 대신 다른건 착하게 해주니까 아 저건 까칠해도 이런대선 맘이 좋구나 이러면서 상대방들도 적응해나가는거 같더라구요;;; 저 또한 길들여지구요.. 미친척 단순하게 이렇게 나가보세요. 그래도 아무일도 안일어나요.

그리고 아버지는 정말 읽으면서 멘붕이 서너차례와서..휴 신고하면안되요??아버지?? 어떡해야돼 증말 ㅠㅠ 너무 어이가없고 화가나서 제대로 뭐라고 욕도안나올지경이네요..

李하나   12.07.31

그래도 아무 일도 안 일어나요- 좋은 말이에요. 감사해요:-)
아버지 일은, 생각하고 노력하고 있어요. 걱정해주셔서 감사해요.

HR-career   12.07.27

사람은 있잖아요. 너무 큰 충격을 받으면, 그 다음 부터는 무뎌지는듯해요.
여자에게 큰 심리적 상처를 받은 뒤로는..여자에 대한 감정이 무뎌졌어요.

李하나   12.07.31

무뎌지는 것, 맞아요. 아무리 충격적인 일이라도 계속되면 무뎌지죠. 저도 마찬가지에요. 14년은 어떤 일이 무뎌지기에 충분한 시간이지요-

jkl   12.07.30

지켜주고 싶은 하나양


李하나   12.07.31

(발그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