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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개일기 한줄일기 내일기장
李하나
 기차 여행   deux.
조회: 3077 , 2012-09-19 11:36


내가 지나온 기차역들을 돌아본다.
'불행'역에 발이 묶여 있다가
겨우 용기를 내 출발해서
'만남'역을 지나
'자존감'역을 거쳐
'사랑'역에 멈춰 섰다.


.
.



앞을 바라다 보면
'권리 의식'역과
'가족'역과
'성폭행 심리 치료'역이다.

멀다.
역간 거리가 상당히 길다.
길도 험하다.
차내식도 없다.
그리고
완전히
혼자다.




지금까지 쉼 없이 달려왔다.
관성, 
인가.
사랑 역은 굉장히 예쁜 역이라고 소문이 났는데
내리지도 않고 
기차 안에 그대로 앉아
얼른 기차가 출발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그 예쁘다는 사랑역을 
차창 너머로 구경하고 감탄만 하면서.
차창에 입김이 하얗게 서리면 
그걸 닦아내고 또 보면서.

화장실도 가고 싶고
맛있는 것도 사먹고 싶지만
마음이 급하다.

지금까지 쉼 없이 달려왔고
아직 갈 길이 멀다는 생각 때문이다.



.
.



누군가 내 앞에 앉는다.
머리가 하얗게 샌 할머니 한 분.
할머니는 내게 어디를 가냐고 묻는다.
나는 나의 종착역 대신 '가족'역을 댄다.

할머니는 다시
여기 잠시 내렸다 가라고 이야기한다.
젊은 사람들이라면 모두 다 쉬었다 가는 곳이라고.
여기서 쉬어가지 않으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역이라고.
그러니 내려서
구경도 하고 감상도 하고 쉬어도 가라고.

나는 갈 길이 멀다고 대답한다.
나는 내 나이 또래 친구들보다 한참 뒤쳐져 있다고.
그러니 부지런히 달려야 한다고.
어서 기차가 출발했으면 좋겠다고.


왜 이렇게 출발하지 않는 거냐고.



할머니는 대답하신다.



정말로 내리지 않을 거냐고.
당신이 내리지 않으면야 나야 말동무가 생겨서 
좋긴 하지만
젊은이가 아직 늙은이와 말동무하며
기차여행 할 나이는 아니지 않냐고.
왜 그렇게 
늙은 사람들과 함께 있으려 하냐고.



.
.


나는 대답한다.
딱히 그러려고 한 적은 없어요.
할머니가 여기 와서 앉으셨잖아요.





"아니, 여기는 늙은이들이 타는 곳이야."
"그런 게 어딨어요. 아무데나 타면 타는 거지."




할머니는 씨익 미소 지으신다.
그리고 창밖을 내다보신다.
아득히, 아련하게.



"나도 여러 번 '사랑'역을 지나치고, '사랑'역에 내렸지."



나는 묻는다.



"사랑역은 여러 갠가요?"



할머니는 나를 빤히 바라보며
터지려는 미소를 앙, 문 채



"그럼요. 언제나 다르지요. 언제나. 그러니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내려야 한다는 거고. 열차는 언제나 탈 수 있고
다른 역은 언제나 다시 갈 수 있지만
이 역만큼은 절대로 다시 돌아올 수 없거든."




.
.



나는 다시 차창 밖을 내다본다.
그리 아름답다 하는데
나는 아름다운 줄 모르겠다.
할머니는 아직도 아련한 눈빛으로 차창에 하아얀 성에를 그리며
사랑역을 바라보고 있다.
나는 그런 할머니를 잠시 관찰하다가,
문득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지 궁금해져



"할머니, 저 역이 예쁘세요?"


아주 천천히 나에게로 고개를 돌리신다.


"저는 별로 예쁜 줄을 모르겠는데요?"



그리고 다시 한 번 미소를 머금으며



"내려 보면 달라요. 보이는 게 다가 아니에요. 내려서 분위기도 느껴보고, 
냄새도 맡아보고, 소리도 들어보고, 사진도 찍어보고. 좋은 곳이 있으면 가서 쉬어도 보고
그렇게 이것저것 해봐야해. 여기 이렇게 앉아서 보기만 해서는 다음 사랑역에서도
똑같이 느낄 거에요. 별로 예쁘지 않다, 고."



.
.



"그런데 저는 정말 시간이 없어요 할머니. 짐도 많아서 내리고 타는 것도 불편하구요.
꼭 내려야 되요?"



"짐 내리는 건 내가 도와줄게요. 내가 도와도 힘들면 기차 안에 탄 다른 사람들도 도와줄 거에요.
이 역에 있는 사람들도 도와 줄 거고."



나는 생각한다.
왜? 
그들이 왜 나를 도와줘? 


"음, 할머니 말고는 안 도와주실 것 같은데요."
"아니에요. 모두모두 도와줄 거에요. 사랑역에 내려 본 사람들은 모두 다."


이쯤 되면 도통 이해할 수 없는 말만 하는 할머니가 조금
낯설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 주름살이 너무 귀엽고 미소가 착해서
그냥 얘기하는 것쯤 어떠랴,
생각하고 만다.

이렇게 이야기하다보면 시간도 빨리가고
그러면 열차도 얼른 출발하겠지.



"아가씨."


내가 잠시 말이 없자, 할머니가 나를 부른다.
나는 다시 할머니를 바라본다.



"열차가 다시 안 올까 불안해요?"


잠시 생각해본다.
그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그런데 생각하니 불안하기는 하다.



"음, 그런 경우도 있나요? 생각해보지는 않았는데. 근데 솔직히 한 번 타고 있던 열차가
더 편하긴 해요. 다른 열차는 아무래도 낯서니까."



"열차는 꼭 다시 와요. 당신이 탈 준비가 되었을 때. 반드시 다시 와요."



"그렇겠죠. 기차니까. 그런데 한 번 타던 열차가 편해요."


나는 헤헤, 하고 웃어보인다.
뭐라고 하지 말아달라는 방어기제다.
할머니는 이제 웃음기를 조금 빼셨다.



"이해는 해요. 익숙한 열차가 편하지요. 그러나 적응도 한 순간이에요.
처음의 그 낯섦만 이겨내면 곧 어떤 열차든 다 똑같아지지요. 그 잠깐의 순간을 
지나치게 확대해서 두려워하지 말아요."



맞는 말인 것도 같다.
나는 이쯤되면 더 이야기하는 것이 귀찮아져서
입을 다물고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차창밖을 바라다본다.
선뜻 내릴 마음은 들지 않는다.


역시
나는 
타던 열차가 편하고
짐을 내리고 싣기 불편하며
사랑역에 그다지 관심이 가지 않고
갈 길이 멀어 마음이 급하기 때문이다.




.
.



할머니는 이제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신다.
더 이상 말은 없으시다.
열차는 출발할 기미가 안 보인다.
그 사이에도 사람들은 계속해서 타고 내린다.


사실 내가 내리기 싫은 이유는 한 가지 더 있다.
아직도 마음이 변하지 않는 나를 어떻게 하면 설득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듯한 할머니에게



"저것 보세요. 다들 내릴 때는 설렘 가득한 표정이다가 다시 열차에 탈 때는
시무룩하거나 울고 있는 걸요."



라고 이야기한다.
할머니는 잠시 생각하는 듯 하시더니
그냥 씨익 웃으시고는 다시 차창밖을 내다보신다.

이제는 나에 대해서 별 생각 없어지신 듯 하여
나도 책을 하나 꺼내든다.


'권리 의식'역의 팜플렛이다.
역으로 가는 방법, 걸리는 시간 등이 자세히 나와 있다.
열심히 공부해서 다음 역에 도착하기 위해 나는 집중한다.
나는 계속 사랑역에 멈춰 서 있으나
사랑역은 바라보지도 않고, 그 역에 내리지도 않는다.


한참을 그렇게 책을 읽다가 문득 고개를 드니
앞 자리에 사람이 한 명 더 앉아 있다.
젊은 여자이다.
할머니는 이야기한다.


"내가 일부러 데려왔어요. 당신이 물어보고 싶은 게 있으면 물어보라고."


나는 왜 이렇게 열심히도 나를 이 역에 내리게 하려는 지 궁금했다.
하지만 악의는 없는 것 같고 그 방식이 그다지 무례하지 않았기에
나는 그냥 앞에 있는 젊은 여자에게로 관심을 옮겼다.
매우 지쳐보여서 뭔가를 물어보기도 조심스러웠다.



"저기, 괜찮으세요?"



나는 조심스럽게 묻는다.
여자는 고개를 끄덕인다.



"이 젊은 아가씨가 어렵게 사랑역에 도착해놓고서도 내리지를 않는다는구려.
내가 답답해서 불렀어요. 얘기 좀 들려줘봐요. 사랑역은 어땠고, 지금은 왜 울고 있는지."


젊은 여자는 코를 훌쩍훌쩍대다가도 할머니의 이야기에
방긋 웃더니 나를 바라본다.



"제가 지금 울고 있는 건, 사랑역을 떠나기가 싫어서 그래요. 정말 좋았거든요. 
그래서 떠나고 싶지가 않아요. 다시는 못 올 걸 아니까. 그래서 우는 거에요."



.
.



나는 그렇구나, 
수긍한다.



"그런데 질려서 떠나는 사람들도 있지 않나요? 싫어서 떠나는 사람들이요."



젊은 여자는 또 웃는다.



"물론이죠. 사랑역이라고 해서 다 좋은 건 아니에요. 제가 여기 오기 전에 내렸던 사랑역은
형편 없었어요. 그래서 이번 역에서 내릴까 말까 많이 고민하다가 내린 건데.
후회는 안 해요. 참 좋았어요."



.
.


나는 도대체 사랑역이 뭐길래 사람들이 이렇게 진지하게 여기나,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다른 역에 섰을 때는 사람들이 내가 내리든 말든 신경쓰지 않았다.
그런데 사랑역에 오니 
다들 내리라고 아우성이다.

그렇게,
대단한 걸까?



다시는 못 온다고 하니
한 번 내려볼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열차도 다시 온다고 하고
짐도 다 들어준다고 하고.



"아, 근데 내릴 ‹ž 할머니가 도와준다고 쳐도 다시 실을 때는 어떻게 하죠?"



할머니는 이제야 방긋 웃으신다.



"그 때도 분명히 누군가가 도와줄 거에요. 저길 봐요."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기차에 다시 오르는 사람들의 짐을 사랑역에 내리는 사람들이 들어주기도 하고
사랑역에서 쉬고 있는 사람들이 거들어주기도 하고
다시 열차에 오르고 있는 사람들이 도와주기도 하고 있었다.
짐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았다.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죠? 이 역."


"아가씨가 하기 나름이에요. 짧게 있을 수도 있고 오래 있을 수도 있어요."


"오래 걸리면 안 되는데. 저 빨리 가야 되거든요."




할머니는 내가 들고 있던 팜플렛을 바라보신다.



"아가씨, 다음 역으로 가는 방법을 공부하는 중이지요? 그 책으로."


"네."


"사랑역으로 오는 길에는 어떤 책으로 공부했나요?"



공부하지 않았다.
나는 그냥 이런 역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나도 한 번 가보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쩌다 이 곳에 서게 된 것이었다.



"음, 여긴 그냥 우연히 온 거에요. 저도 모르겠어요, 어쩌다가 온 건지는."


"역이란 건 말이에요, 공부하지 않아도 갈 수 있는 방법이 있어요."




나는 미간을 살짝 찌푸린다.
나는 지금까지 계속 공부하면서 다음 역을 찾아갔었다.
공부하지 않고서는 찾아갈 수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정말요? 가만히 있으면 그냥 다음 역으로 가는 거에요?"



할머니는 고개를 천천히 저으신다.



"아니아니, 가마안히 있으라는 건 아니고. 책으로 공부하지 않아도 된다는 거지요."


"그럼 어떻게 가요?"


"'실재'하는 것으로부터 배우세요."


나는 잠시 머리를 굴려본다.
잘 모르겠다.
'실재'하는 것?



"그게 뭔데요, 할머니?"


"사랑역에 내려서 사랑역으로부터 배우세요. 사랑역 안에 있으면서 배우세요.
사랑역 안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배우세요. 무형의 것으로부터, 배우세요."


아리송하다.
무슨 시 같기도 하고.




"경험으로부터 배우라는 말씀이신가요?"



"아니아니."



"그럼요?"







"사람으로부터 배우라는 말이에요."


"사람들한테 물어보라구요?"



할머니는 인내심 있게 웃으신다.




"아니요."

"그럼요?"

"그냥, 그냥 그 사람과 함께 있으세요. 그러면, 배워질 거에요."


.
.




"잘 모르겠어요."


"사랑역은 가장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역이에요. 다른 역은 몰라도. 
사랑역에 잘만 내려서 잘 구경하면 다음 역으로 갈 수 있는 방법을 알 수 있을 거에요.
잘 믿지는 못하겠지만, 그럴 거에요.



아니, 아니지.
다음 역으로 갈 수 있는 방법을 알 수 있는 게 아니지."



"네?"



"어느새 다음 역에 가 닿아 있을 거에요."



.
.



나는 생각한다.
사랑역이 그리 대단한 곳인가.
하지만 할머니는 거짓말쟁이 같아 보이지는 않는다.
이미 사랑역에 내려본 젊은 여자도 연신 옆에서 고개를 끄덕인다.
이 두 사람이 작정하고 나를 속이려 하는 것 같지는 않다.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듯한 이야기.



살짝,
마음이 동한다.


잠깐,
내렸다 갈까?
뭐 열차도 올 거고.
짐도 다 들어줄 거고.
다시는 못 온다 하니 좀 아쉽기도 하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당신이 여기서 꼭 내려야만 하는 이유는,"



할머니는 나에게 시선을 꽂으시고 말하신다.



"저 안에서 누군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에요."



이건 또 무슨 소리일까. 
내가 여기에 오는 줄은 어찌 알고
누가 나를 기다린단 말인가.



"누가요? 아니, 그보다 할머니가 그걸 어떻게 아세요?"


"사랑역이란 본래 그런 거에요. 사랑역에 서는 것 자체가, 당신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니까요. 지금 저 안에서 당신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요.
내려서 만나야 해요. 당신이 그냥 지나친다면, 그 사람은 상처를 입을 테니까."



.
.


나를 기다리는 누군가가 저 안에 있다, 라.



"물론 그는 당신이 사랑역에 멈춰 섰다는 것만으로도 좋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는 당신이 내리기를 기다리고 있어요. 그리고 당신과 함께 사랑역을 구경하고 싶어해요.
그리고 당신이 만약 그냥 지나쳐버린다면 기분이 좋지는 않겠지요. 얼마나 힘들어할 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
.



나는 다시 한 번 사랑역을 내다본다.
북적북적한 게 괜찮을 것 같기도 하다.
잠시,
쉬어가볼까.


갈 길이 멀기는 하지만
여기서 잘만 하면 다음 역에 갈 수도 있다고 하니.



"정말 여기서 잘 하면 다음 역으로 더 빨리 갈 수도 있는 거지요, 할머니?"



할머니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신다.
나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망설여본다.



"아가씨"


할머니를 바라본다.




"아가씨의 종착역은, 나에게 이야기했던 것보다 훨씬 멀지요?"



나는 잠시 망설인다.
어느 역인지 말하지 않으면 되니까,



"네. 좀, 아니 아주 멀어요. 다른 친구들의 역보다 훨씬 멀어요. 그래서 제가 마음이 급한 거에요.
멀어가지고. 얼른 가야 하거든요."



"그 역에는 왜 가려고 하는 거에요?"




내가 성폭행 심리 치료 역에 가려 하는 이유,



"제 생의 많은 문제들이 그 역으로부터 비롯되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얼른 그 역에 가서 그것들을 모두 털어버리고 싶은 거로군요."




"네."





.
.


"어딘 진 몰라도 정말 멀거에요. 생의 문제의 근원, 이 되는 역이라니.
그런 건 나도 아직 못 가봤는데 말이에요."




못 가봤다고? 
이런.
할머니가 될 때까지도 못 갈 수도 있다는 걸까?




"아가씨. 아가씨는 그 역에 내리기만 하면 모든 게 해결 될 거라고 믿고 있지요."


"네. 그 역이 제 문제의 근원이니까요."



할머니는 다시 웃으신다.
참 미소가 부드러운 할머니다.



"그래서 그 역을 '종착역'이라고 생각하고, 거기서 여행을 끝낼 계획을 세웠겠지요."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여행은 거기서 끝나지 않을 거에요."





"나를 봐요. 할머니가 되도록 이 열차에 타 있잖아요."





"아가씨가 종착역이라 생각하고 그 역에 내렸을 때, 반드시 아가씨에게는 새로운 계획이 생길
거예요. 다른 역에 가고 싶어지겠지요. 그리고 여행은 다시 시작될 거에요."





"그러니 지금 갖고 있는 종착역에 목숨 걸지 말아요. 기차 여행은 그리 짧지 않아요. 
그냥, 한 역 한 역에 집중하면서 그렇게 여행하세요. 그러다가 내리게 되는 마지막 역이
아가씨의 종착역이 될 수 있도록.


종착역은 아가씨가 정하는 것도, 누가 정해주는 것도 아니에요.
그렇게 '되는' 거지."




무슨 말일까.
종착역은
종착역이 '되는' 것이다?





"제 여행에 끝이 없을 거란 말씀이신가요?"



할머니는 고개를 주억거리신다.



"그래요. 끝내려 하지 말아요. 계속 하려 하세요. 그러면 여행이 조금 더 자유로워질 거에요.
내리고 싶은 역에서 마음대로 내릴 수도 있을 거구요. 마음이 급해 내리고 싶은 역에서 마음대로
내리지도 못하는 것은 여행이 아니지요. 그건 그냥 '일'이나 '출장'일 뿐이에요."



"여행은
자유로워야 해요.
왜냐하면
여행은
온전히 아가씨의 것이니까.
다른 누구의 것도 아니니까."



.
.





여행은
자유로워야 한다.
나의 것이기 
때문이다.





.
.



"내릴...까요?"


역시 대답은 없이 웃기만 하신다, 할머니는.
그러라고 하는 것 같기도 하고
네 맘대로 하라는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주섬주섬 짐을 챙긴다.
할머니도 옆에서 거들어 주시고
젊은 여자도 거든다.


짐을 챙기는 순간까지도
아, 그냥 갈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뭐
어차피 열차는 다시 올 거고
할머니의 말씀을 들어보니
한 번쯤 내려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천천히 할머니가 하신 말씀들이 무슨 말인지
생각도 해보고.
조금 오랫동안 차를 타고 있었으니
잠시 쉬어가도 될 것 같다.




.
.


할머니와 젊은 여자와 함께 짐을 내렸다.
그리고 플랫폼 안에 있는 보관함에 넣는 것까지 같이 도와주셨다.
나는 감사하다고 인사를 드린다.
할머니와 젊은 여자는 다시 기차에 오른다.
젊은 여자는 마지막 순간까지 사랑역을 뒤돌아보며
아쉬운 듯 발걸음을 뗀다.



나 또한 저럴까,
아직은 잘 모르겠다.
그저 낯설 뿐이다.



내려 본다.
생에 처음으로
사랑역이라는 곳에 내려 본다.



그나저나 나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어디에 있을까.
왜 기다리고 있는 지
얼마나 기다렸는지
나랑 뭘 하고 싶다는 건지
물어봐야 하는데.



우선 사랑역을 좀 둘러볼까.
첫인상이
나쁘지는 않다.



천천히 
쉬었다 
가야겠다.




여행은
잠시
아무려나 
좋을 것 같다.


의자에 길게 누워본다.



내 위로 그림자가 드리운다.
나는 직감한다.
나를 기다리던 사람이라고.



'왜 이제 왔어'


라고 간지럽힌다.
나는 깔깔대며 미안하다고 이야기한다.


'기다렸어'


살짝 칭얼대는 그의 목소리.
나는 그런 그를 그저 바라본다.
낯설지 않다.
그리고 
싫지 않다.
아니,
좋다.
고맙다.

여기서 나를 기다려주고 있었다니.
그는 나에게 손을 내민다.


'가자'



나는 그 손을 잡는다.
그리고 그에게 팔짱을 낀다.



내린 게
잘 한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어쨌거나
나는 이미 내렸다.
역 구경이나 해볼까.


이 사람과 함께.



밖으로 나온다.


그가 나를 보며 웃는다.
나도 그를 보며 웃는다.



좋다.





차분히 
이곳이 내 주변으로 가라 앉는다.
공기를 들이마신다.
냄새를 맡는다.
그의 체온을 느낀다.



좋다.



햇살이 비친다.
기차는 다니지 않는다.



'밥 먹을까?'


그가 묻는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뽀뽀'



그는 입술을 쭉 내민다.
나는 그에게 뽀뽀한다.



고맙다.


네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구나.




'나를 왜 기다리고 있었어? 나한테 뭐 부탁할 거 있어? 아니면 뭐 필요한 거라도 있어?'



그는 잠시 굳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아니. 그런 거 없어.'


'근데 왜?'





'그냥. 너 보고 싶어서.'



'내가 왜 보고 싶냐니까. 뭐 해줘?'



'아니라고.'



'나한테 부탁할 것도 없으면서 왜 나를 기다려. 뭐 할 말 있어?'


'그런 거 아니라니까.'



'아 그럼 뭔데.'




'그냥 네가 보고 싶고 그냥 네가 좋아. 그냥 네가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그냥?'



'응, 그냥.'




.
.




그냥
누가 나를 기다렸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닌



그냥
'나'
를 기다렸다.



'나 조금 늦었는데, 화 안 났어?'


'화 났어.'


'미안. 뭐 사줄까?'


'아니.'


'그럼? 뭐 해줄까?'


'아니.'


'그러어어엄. 어떻게 해야 되? 응?'


'그냥 있어.'


'응?'


'그냥 있어도 된다고. 왔으니까 괜찮아. 왔잖아.'





.
.




그냥.
왔으니까.
나니까.



내가 좋다고 한다.
내가.
나를 좋아한다고 한다.
나를.


나의 겉모습이 아니라
수백만 가지의 나의 여러 모습들, 
나의 여러 상징들이 아니라
그것들을 모두 하나로 모아주는
그런 존재의 덩어리
'내'가 
좋다고 한다.



'정말이야?'


'응.'


'정말 내가 좋아?'


'응. 좋아.'


'내가 해줄 수 있는 거, 뭐 그런 게 아니라. 내가 뭐 안 해주고 못 해줘도 좋아?'



'응. 좋아.'




.
.




그런 게 가능할까?




'왜?'


'몰라.'


'응?'


'모른다고. 그냥 좋아.'




.
.


모른다.
그냥이다.




이유는
필요 없다.



그에게 안긴다.
그가 나에게 이야기한다.
내 눈을 보면서.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