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에서 돌아왔다.
정말 신기하게도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를 타자마자
전구가 켜지듯,
'외로움'이라고 이름 붙일 만한 느낌이
몸의 윗부분 어디선가에서부터
스며나오기 시작했다.
.
.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
필리핀의 그 작은 마을에서 지낼 때는
알고 있었던 사람이라고는
스무 명 남짓 되는 한국인들밖에는 없고
나머지는 다들 태어나서 처음보는
필리핀 사람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외롭지 않았다.
그런데 막상
아는 사람 천지인 한국에 돌아오니
심지어 가족까지 있는 곳인데,
외로움이 피어 올랐다.
도대체 왜일까,
그 곳과 이 곳은
무슨 차이가 있는 걸까.
어떻게 하면 이 곳에서 외롭지 않게 살 수 있는 걸까.
아니면
외롭지 않으려면
외롭지 않을 수 있는 곳에 가야 하는 걸까.
외롭지 않을 수 있는 환경,
으로.
.
.
확실히 몇 번의 여행을 통해 깨달은 것은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외로운 존재는 아니라는 것이다.
충분히 이보다 덜 외로움을 느끼며 살 수 있다.
모든 사람은 외롭다는 말로
나의 외로움을 합리화시킬 수는 없는 것 같다.
왜냐하면 나는
한 줌의 외로움도 깃들지 않은
시간을 보내고 돌아왔기 때문이다.
외롭지 않고
안정감 있는 그런 상태가 어떤 상태인지
겪었기 때문이다.
환경,
의 영향이 가장 크다.
나는 그대로인데
내가 있는 장소가 바뀌었다는 것만으로
나는 외로움을 느끼지 않았고,
외로움을 느꼈다.
적어도 지금까지 나온 변수만을 놓고 보았을 때는
그렇다.
.
.
작은 마을이 주는
단순한 삶과
마을 사람들 모두가 서로를 알고 있는
그런 관계성이 주는
안정감.
인터넷이 되지 않음으로서
행동반경과 고려반경이 일치하는 곳.
도시는
내가 갈 수 있는 곳보다 더 멀고 넓은 영역을
고려할 수 있다.
나는 지금 우리 집에 있지만
내가 '염두'에 두고 있는 공간은
여기서부터 필리핀까지다.
잠재적 행동 반경이
심하게 넓어지고
그 넓은 곳 안에 나는
홀로 존재한다는 느낌 때문에
외롭고
무서운 것이다.
생물이 넓은 영역에 혼자 있는다는 것은
생존 확률이 떨어진다는 것이고
지금의 상태와는 다른 상태가 내게 필요하다.
내가 속한 영역을 줄일 필요가 있고
조금 더 견고한 관계에 속할 필요가 있다.
생존 확률을 높일 필요가 있는 것이다.
.
.
아주 본질적인 것으로의 회귀.
가장 단순한 그곳.
一
단 하나에 가까운.
.
.
도시엔 많다.
무엇이든지 많다.
사람도
가능성도
할 일도
감정도
생각할 거리도
필요한 것도
할 수 있는 것도.
필리핀에서는
할 수 있는 컴퓨터도 없고
인터넷도 안 되니
어두워지면 가족들하고 이야기하다가
자든지
손으로 뭘 쓰든지 할 뿐이었다.
오늘 아침에 눈을 떠서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핸드폰을 붙잡고
인터넷을 사용한 일이었다.
누워서 티비를 보다가
컴퓨터를 하러 들어왔다.
아마 이 모든 것들이 되지 않았더라면
나는 바깥에 나가든지
손으로 할 수 있는 무언가를 붙잡았겠지.
하지만
할 수 있는 이상
하지 않기는 힘이 든다.
그런 면에서는
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부러워진다.
나는 어째서 하지 않을 수 없는 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보면
참는 것은 굉장히 힘든 일이다.
차라리 이 모든 것들이 없는 곳에서 사는 것이 편하다.
없다고 해서 불편하지는 않으니까.
그냥 없으면 안 하면 그만이다.
그런데 있으면 하게 되는.
그러니까
없으면
안 할 수 있는.
.
.
삶을 단순화시킬 필요성을 느낀다.
거창한 꿈 같은 것도 필요 없다.
많이 가질 필요도, 많이 누릴 필요도 없다.
그리고 너무 많은 것을 할 필요도 그다지 느끼지는 않는다.
본질적인 부분만 건드려주면 된다.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것들만 잘 지니고 살면
그걸로 됐다.
지나치게 많은 것을 알 필요도 없고
너무 많은 것을 느낄 필요도 없다.
내가 행복할 수 없다면
다 부질 없는 것들이다.
환경이란 것은
참 사람을 강하게 결정 짓는다.
내가 아무리 벗어나려 발버둥을 쳐도
내 마음대로 되지를 않는다.
그렇다면 내가 나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최선은
이제 있는 힘껏
내가 행복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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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
본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