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2 │ 미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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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야 오늘 선생님 좀 도와야겠다." "네. 뭔데요?" "생활기록부정리거든. 어.. 이거는.. 아니고.." 담임선생님께서 여러 뭉치들을 뒤적이십니다. "그래.. 요것만 정리하면 된다." 우리 반 생활기록부입니다. 뭐.. 건강기록부 끼워넣으라는 거겠죠. "그 학생 야자도 안한다면서요?" "수업도 지 맘대로에요. 내가 뭐라 그러고 싶어도 일본에서 왔으니까 지 스타일은 이거래요." "참.. 요즘 것들은.." 교무실에 앉아있으면 선생님들 대화는 노력하지 않아도 다 들리게 돼있습니다. "이름이.. 유은석이라던가..?" "예. 지 엄마가 디자이너라잖아요." "그래도 한국말 저렇게 하는게 신기하네요.일본에서만 자랐단 아이가.." "그래도 잘해줘야지요.. 애가 그런 처지에 있으니까." 은석... 일본에서 온 아이었습니다. 그럼 말로만 듣던 재일교포.. 그 처지가 어때서.. 그나저나 자기 담임한테 꽤나 미운털 박힌 것 같았습니다. 근데.. 저 대머리 선생님은 1반 담임선생님인데.. 유은석의 반을 자연스럽게 알아버렸습니다. 아주 먼 반입니다. 저희 반은 2학년 중 가장 끝반인 18반 이었거든요. 제 손은 어느새 옆에 쌓여있던 1반의 생활기록부로 갔습니다. 건강기록부도 정리가 돼 있습니다. 일본에서 온 아이라.. 그 아이껀.. 정리가 안된 모양이었습니다. 새 종이에 연필로 뭔가 한문이 쓰여있었지만.. 한문까지는 관심이 가지 않았던 지라 뜻을 알수는 없었습니다. 신상기록은 돼 있었습니다. 혈액형.. A형.. 저도 A형 입니다. 유.. 유씨를 학교에서 만난것도 반가운데.. 같은 한문을 씁니다. 문득 친구가 학교에서 읽던 연애박사 라는 책의 한부분이 생각났습니다. '공통점을 발견하라. 그럼 맘에 드는 이성과 가까워질 수 있다.' 그 책.. 엉터리라고 생각했는데.. 친구한테 가서 쓸만한 책이라고 말해줘야겠습니다. '처지가 그런데....' 아까 한 선생님의 말씀이 계속 귀에 맴돕니다. 일본에서 살다가 왔으면 외로울 거 같습니다. 왠지 비스한 처지에 놓인 느낌도 들고.. 전 정리를 끝내고 뒷뜰로 향했습니다. 지금은 자율학습시간이지만 전 자유롭습니다. 심부름을 끝낸 반장의 특권이라고 할 수 있죠. 아직 저녁시간 지난지 얼마 안됐는데 겨울이라 벌써 어둑어둑합니다. 저는 벤치 보다는 나무가 우거져 어두운 담쪽의 공간을 좋아했습니다. 어렸을 때 부터 워낙 혼자인 시간을 보냈기에.. 친숙했으니까요.. 전 그날도 치마를 움켜쥐고 나만의 공간을 찾아 나무를 헤치며 들어갔습니다. "부시럭.." 분명 제가 낸 소리는 아니었습니다. "아파.. 그만 좀 비켜.." 그러고 보니 발 밑에 뭔가 물컹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손가락이었습니다. "악!" 그 느낌이 너무 끔찍해 제가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 손가락.. 얼마나 아팠을까요.. "참나... 매번 이래도 되는거야?" 목소리... 이 목소리.. "자전거 훔쳐놓고 울고, 내 손가락 밟아놓고 소리 지르고.. 뭔가 바뀐 느낌 안들어?" 저 삐딱한 말투... "미안.. 근데.." "왜 야자안하고 여기있냐구?" "아니.. 넌 어제도 안했잖아." "그럼 뭐?" "여기.. 내 자린데.." "..............." ".............." "푸하하~~" 그 아인 학교가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웃어댔습니다. 전 그 아이의 그 입을 막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대로 내버려뒀다간 정말.. 교실에 있던 학생들과 선생님이 다 나올 것 같았거든요. "조용히 해." 전 손을 땠습니다. 갑자기... 그 아인..... 절 눕혔습니다. 너무 순식간이라.. 몸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눈을 뜨니 그 아인 제 위에 있었습니다. "비켜!" 전 그 아이의 뺨을 때렸습니다. 그 아인 웬일인지 순순하게 비켰습니다. "이거 아냐? 장소가 안 좋은거야?" "............." "너 같은 애들 뻔하지 뭐. 관심끌기.." "무슨 말 하는거야?" "매점에서, 교문 앞에서, 뒷뜰에서.. 우연이라고 말할 생각은 아니지?" 눈물이 흘렀습니다.. 제가 이런 실수를 저지르다니.. 사람을 잘못봤습니다. 이렇게.. 말투뿐만 아니라 정신까지 삐뚤한 아이를 맘에 담아 두고 있었다니.. 전 옷을 추스리고 일어났습니다. 그 아인 아무렇지 않은 척 앉아있었습니다. "니눈에.. 똑바로 보이는거 하나라도 있니? 넌... 저 시계탑도 삐뚤어져서 보일꺼야.." 전 그 길로 교문을 뛰쳐나갔습니다. 절대 바른학생이었던 제가.. 책가방도 교실에 놔둔채 교문을 뛰쳐나갔습니다. 근데 그건 아무렇지 않습니다.. 다만 그 못되먹은 유은석을 보며 말을 할 때 끈임없이 눈물을 흘린게 분할 뿐이었습니다. 그 눈물때문에 한없이 제가 약해보였겠죠. 당하고 우는 여자의 눈물.. 제 교복의 단추는 하나도 풀어지지 않았지만.. 제 가슴은 갈기갈기 찢어진 것 같았습니다. 이 눈물.. 또 한번터진 이 바보같은 눈물이.. 언제쯤 그칠지.. 전 집으로 뛰어갔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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