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4   미정
  hit : 293 , 2002-02-07 04:14 (목)




"와~ 이제 일주일만 있으면 방학이다!"

"그래도 우리는 학교 오잖아."

"꼭 반장티를 내요.. 알어. 안다고."

벌써 방학이 일주일 뒤로 다가왔습니다.

이제 내년이면 고3인데.. 공부걱정이 앞섰습니다.

유은석..

갑자기 유은석의 성적이 궁금했습니다.

왠지.. 잘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날 솔잎으로 제 손가락을 따 줬던 이후로

그 아이를 못봤습니다.

식당에도 없고 하교길에도 없었습니다.

그나저나 그 우스운 광경을 연출했던 이후 전..

학교에서의 이미지가 많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 전의 차갑던 이미지가 많이 녹았다나봐요.

물론 친구들의 예쁘게 포장된 말이었죠.

저와 그 아이가 그렇고 그런 사이라고

소문이 났나봅니다.

어딜 가든 듣고 싶지 않아도 그런 내용의 수근거림이

제 귀로 들어왔으니까요.

유은석..

그 아인 외계인 같습니다.

갑자기 나타나서 날 화나게 만들었다가

날 또 웃게 만들고..

싫어졌을 땐 내 앞에 나타나 내 마음을 풀어주고

이렇게 보고싶을 땐 사라져버리는

그런 외계인...







"자~ 오늘이 방학식이지만 너희들한테 다를껀 없다.

오늘도 야자를 하고 방학 이후로도 이와 같은 생활은

계속 될테니까 긴장 풀지 말도록. 예비 고3들."

선생님의 조례가 끝나자 여기저기서 아이들의

한 숨 소리와 어깨 처지는 소리가 들립니다.

정말 우리나라의 입시제도는 기가 막힙니다.

우리에게 완벽한 고통과 스트레스를 줄 수 있는 시스템을

어떻게 이렇게 잘 만들었는지...

서론이야 어떻튼..

예비 고3에게도 겨울방학이 왔습니다.

방학이라 이름 붙이기 묘한 방학....

















오늘의 하루 일과도 이렇듯 끝났습니다.

언제나 그랬듯 우리는 달을 보며 하교합니다.

"은하야~ 내일봐. 안녕~"

"안녕~"

"잘가~"

친구들은 모두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가기 때문에

전 저혼자 걸어갑니다.

처음엔 학교에서 집이 가까워 좋아했는데

2년 가까이 생활해본 결과.. 더 외롭습니다.

'따르릉~'

저 앞의 전봇대에서 들리는 소리였습니다.

가까이 걸어가자 형체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자전거를 짚고 서 있는 아이.

"하루 일과가 끝나면 항상 이시간이야?"

이 추운 날에 그 아인 목도리 하나도 안 두르고 서 있습니다.

가까이서 보니 정말 외계인 같습니다.

이렇게 추운 날씨에 저렇게 살을 드러내고 있어도

붉지도.. 하얗게 터 오르지도 않았습니다.

"빨리 타."

"어?"

"타라고. 태워주겠다고."

가만히 보니 자전거 뒷자석에는 목도리가 놓여져 있었습니다.

약속한 것도 아닌데.. 이렇게 절 기다려줬습니다.

"오래 기다렸어?"

"미쳤어? 이 추운 날씨에.. 방금왔어."

전 뒷자석에 올라앉았습니다.

그 아인 자신의 허리를 꽉 잡으라며 제 손을 자기 허리에 놓았습니다.

그 때 만져진 그 아이의 손...

방금왔다는 말이 거짓말이었다는 걸 알게 해주었습니다.

너무 차가워서.. 순간 제 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였으니까요.

그 아인 페달을 밟기 시작했습니다.

제 얼굴은 그 아이의 등이 있어 춥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스타킹만 신고 있는 제 종아리 때문에

불어오는 바람이 얼마나 차가운지 알 수 있었습니다.

"잠깐만 세워."

"뭐하러?"

"세워봐."

그 아인 천천히 자전거를 세웠습니다.

전 제 목도리를 풀어 그 아이 목에 감싸줬어요.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습니다.

곧 그 아인 뒤돌아 보지 않은 채 말했습니다.

"내 목도리 깔고 앉아있는게 미안하긴 한가보네."

그리곤 다시 페달을 밟았습니다.

이 아이의 이런 삐딱한 말투가 ...

이젠 듣기 좋습니다.

까칠한 말투 속에 따뜻한 속마음을 읽을 수 있으니까요.

"여기서 왼쪽으로 턴."

"..........."

"두번 째 블럭으로 들어가야 돼."

"..........."

어느 일류기사도 부럽지 않습니다.

비록 무뚝뚝하고 약간은 버르장머리가 없지만

지금 만큼은 저의 충실한 기사이니까요.

"여기야. 여기 8층."

자전거는 드디어 섰습니다.

그 아인 아무 말 안했지만 전 알 수 있었습니다.

제가 내리기 편하도록 자전거를 옆으로 기울여주는

세심함 배려를..  

"집에 불이 다꺼져 있잖아. 부모님 다들어디가셨니?"

"아니. 원래 거실 불은 꺼놓으셔. 우리 엄마가."

왜 거짓말을 한건지...

거짓말을 할꺼면 완벽하게 해내든지..

또 수도꼭지 풀어버렸습니다.

그 아인 말 없이 자전거를 끌고 앞쪽 놀이터로 향합니다.

그리곤 돌아보더니 고개로 절 부릅니다.

항상 멋있는 제스처만 골라서 합니다.

전 여전히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않은 채 따라갔습니다.

그 아인 자전거를 조심스레 눕혀둡니다.

이제야 알았습니다.

저 아인 자전거를 소중히 다루는 구나..

제가 오해했던게 부끄러워졌습니다.

우린 자연스럽게 그네에 앉았습니다.

"너.. 거짓말 하면 어떻게 되는 줄 알어?"

"..........."

"코가 아주 많이 길어져."

"흡.."

웃음이 나와버렸습니다.

재빨리 입을 다물어 멈췄지만...

"너 울다가 웃으면..."

"그만해. 안 웃겨."

"웃고 있잖아. 지금."

정말 고마웠습니다.

거짓말 한게 들키면 참 많이 부끄러울 줄 알았는데

되려 제 무겁던 기분을 풀어줍니다.

"나... 엄마 안계셔. 내가 아주 어렸을 때 돌아가셨데.

근데 우리 집은 제사도 안해.."

".............."

그 아이가 날 보는 시선이 느껴집니다.

제가 왜 이런 얘길 하는지.. 아직 한번도

남에게 해본 적 없는 얘기들을..

"근데.. 엄마가 보고 싶어. 다른 때는 괜찮은데... 잘 참는데..

오늘은 왜 이런지 모르겠어.."

눈에서 떨어지는 눈물이 치마를 적십니다.

그 때 포근한 느낌이 제 폼을 감쌉니다.

전 놀라서 몸을 들썩였습니다.

그러자 그 포근한 느낌은 절 더 포근하게 감쌉니다.

"남자라고 생각하지말고 겨울코트라고 생각해.

바람이 많이 차다."

그렇게 그 아인 절 한참 동안 안고 있었습니다.

제가 집에 들어가기 싫어한다는 걸 알고 있었는지..

계속 절 그렇게 감싸줬습니다.

너무 따뜻해서 눈물이 멈췄습니다.

그런데 이미 흘렸던 눈물이 그 아이의 교복을 적셨습니다.

이렇게 따뜻한 아이가..

왜 그날 뒷뜰에선 그렇게 무서웠을까요..

그 아이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일본에서 많이 외로웠어... 한국인이라고 경계하는 사람들,

내 얼굴만 보고 한번 건드려보는 여자들, 아버지 없이 엄마랑

단 둘이 살아갈 때 느끼는 적막감.. 다 참기 힘들었어. 근데 그런

거 아무것도 아냐. 적막감.. 그거 아무것도 아냐. 은하야..."

그 뒤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서서히 그의 팔이 제 어깨에서 풀렸습니다.

"더 늦기 전에 집에 들어가."

"넌 추운데 어떻게 갈꺼야...?"

"난 추위 안타. 이거나 받아."

그 아이는 교복마이 안 주머니에서 무언갈 꺼냈습니다.

베이비 로션....

".......?"

"너 맨날 그렇게 울면 겨울에 얼굴 다 갈라져."

"안.. 갈라져..."

"안 받을꺼야?"

"내가 아기야? 내가 왜 이걸 발라?"

"키는 밤톨만한게.. 오빠 말 들어라."

그러고는 제 머리를 쥐어 박습니다.

그 아이의 이런 점이.. 절 흔듭니다.

오빠......?

키 167cm의 결코 작다는 소리 안들어본 제가..

이 아이에게 밤톨이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저는 제 화장대에 있던 모든 스킨로션을 다 치웠습니다.

이것만 바르고 싶었거든요.

근데... 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로션.. 한번도 안발랐습니다.

아까워서 항상.. 뚜껑만 열어보고 닫았으니까요.

7000원도 안하는 그 베이비 로션이 아까워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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